2009년 08월 08일
Chapter 3 - 파비아 전투 The Battle of Pavia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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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날 보고 짖는다고 그 개를 죽이진 않겠소.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네우스트리아의 함대가 유란드라 제국으로 출병을 떠나는 날을 앞두고 어전 회의가 열렸다. 전의 원탁회의에서 결의된 바대로 출병은 기정사실화가 되었고, 이제 그것을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절차인 것이었다.
프랑수아 황태자는 출병을 앞둔 '명목상의 지휘관'을 상징하듯 제국의 장교복을 입은 채 알현실에 놓인 거대한 크기의 길쭉한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어전 회의를 이끌고 있었다.
제국 재상 부르봉 공 레이몽드와 대상서(Chancelier) 몽모랑시-라발 공 베르나르, 그리고 드룬가리우스 오를레앙 대공 기베르가 삼두체제로 이끌고 있는 이 회의는 전쟁에 관련된 선전 포고, 전쟁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교황청의 교황에게 보낼 친서의 내용, 중립을 지킬 몇몇 왕국과 공국에 대한 외교 문서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었다.
"분명 알렉산데르 6세 성하께선 이 전쟁을 묵인하는 대가로 교회 세와 십일조(十一租 : dime)에 대한 과세를 우리 제국 쪽에도 요구할 겁니다.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죠."
"저도 동감입니다. 교황청의 전쟁 놀음과 성당 짓기 놀이에 우리까지 박자를 맞춰줄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요새는 면죄부라는 것도 팔려고 한다는데 그것까지 여기에 들어올까 걱정이 됩니다."
'…면죄부?'
그 말에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슈아가 자신이 전에 들은 소문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현재 게르마니아 남부 지방 쪽에서는 교황청에서 파견한 면죄부 판매관 라첼(Ratchell) 때문에 시끌시끌해졌다는 것이었다.
원래 크로노디스 교에서는 죄를 지었을 때 고해성사를 통해 신의 용서를 확실히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죄를 용서받고 난 후에 죄로 인한 벌은 후에 연옥(Purgatorium)에서 받아 죄로 인한 오점을 정화 받게 되는데, 교회는 성경에서 성 아서 대왕에게 천국문의 열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열쇠의 기사’ 성 란셀롯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한으로 성인들의 공로를 나누어 베풀어 하늘에 일정한 전체 보속(Satisfactio)을 바치면 그 연옥에서의 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것을 대사(大赦 : Indulgentia)라고 하는데 이 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팔게 된 것이었다.
기존 식으로 보속을 받게 된다면 “성지까지 주기도문을 끊임없이 외우며 세 번 왕복해서 순례하시오.” 등등의 가혹한 보속으로만 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모래알이든 바위든 가라앉는 건 마찬가지다.”라는 논리로 어떤 죄라도 그 경중에 관계없이 가혹한 보속을 요구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평신도들이라면 이런 대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옥에서의 벌이 면제되고 천국으로 가는 몸이 된다는 것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라첼이란 자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사서 대사를 받으면 그 대금이 모금함 통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 자의 영혼에게 천국으로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계단이 내려온다고 하니 평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면죄부를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라첼은 그걸로 끝내지 않고, 이 면죄부는 사도들과 동격인 '호수의 주교' 교황 성하의 권능에 힘입은 물건이기 때문에 어떤 죄라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살인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소문들 중에는 심지어 면죄부만 있으면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아들과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가져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도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는 라첼이란 그 작자가 면죄부를 팔기 위해 연설 중에 설사 성모(聖母)를 범해 임신시킨다고 하더라도 면죄부만 있으면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신성모독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딴 개소리가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애초부터 그 교황이란 작자부터가 문제라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그가 유란드에서 들려오는 풍문을 들어본 것만 해도 그곳은 이미 성도(聖都)가 아니라 성도(性都), 육욕과 죄악의 도시 바빌론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가 들은 소문 중에는 심지어….




그렇게 조슈아가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의 어지(御旨)입니다."
알현실 문 밖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시종장 도나티엥(Donatien) 경이었다.
시종장(Praepositus Cubiculi)이라는 직위는 황제의 옆에서 그의 건강과 생활의 편의를 위해 시중을 드는 일을 총관장하고 또한 황제의 황명을 출납하는 일도 겸하고 있는 지위이다. 그런 그가 이곳 회의실에 나타났다는 것은 곧 황제의 명을 받고 왔다는 뜻이다.
그의 등장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하자 그는 그 시선을 의연히 받으며 프랑수아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황태자 전하에 대한 예를 올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펴서 읽었다.
"이번에 그대들과 태자가 이끄는 원정에 대해 짐은 우선 축복을 내리노라. 그리고 또한 여기서 그대들에게 하나의 명을 내리고자 한다. 이번의 원정은 그 의미가 각별하고 또한 그 중요성이 큰 바, 군을 이끌 태자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 짐의 생각이다. 그래서 짐은 황태자 프랑수아 루이 아르튀르 엘 발루아(Francois Louis Arthur el Valois)에게 전장에서 짐을 대신하여 인사권과 군사권을 대리청정(代理聽政)할 권한을 내리고자 하노라."
"…?!"
시종장이 읽어내리는 황제 앙리의 윤음(綸音)에 레이몽드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사실 전투에 황족이 참여할 경우 그 황족이 때에 따라 전장에서 임의로 적절한 임명권과 지휘권을 행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란 건 레이몽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어지에서, 황제가 실제적으로 제위를 태자 프랑수아에게 물려주려는 물밑 작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레이몽드가 눈치 챈 것이었다.
"아, 그러나 아직 어린 세손(世孫)이 당파를 알겠으며, 국사를 알겠으며, 또한 조정의 일을 알겠는가? 대법관으로는 누가 좋은지, 재정 대신으로는 누가 좋은지, 파트리키우스 (Patricius)로는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를 알겠는가? 이런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짐은 그것이 걱정이로다."
하지만 황제도 걱정이 되기는 했었다. 지금 읽어 내리는 이 말은 겉으로 보면 프랑수아의 자질에 대한 염려의 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커져버린 신하들의 권세에 프랑수아가 제대로 말이라도 꺼낼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한탄이었던 것이었다.

"이보시오, 시종장."
그렇게 황제가 걱정하던 대로, 레이몽드 공작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외쳤다.
"도나티엥 경 당신은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중요한 자리에 그 어지를 들고 온 것인가!"
그렇게 일갈하는 재상의 모습에 조슈아는 순간 어이가 없었는지 입만 멍하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제의 어지를 공표하러 온 시종장에게 저딴 식으로 묻는다는 게 신하가 할 짓이란 말인가…
"회의 중에는 일체의 방해도 있어선 안 되고 또한 출전 전에 지휘 계통을 어지럽히는 의견이 나와서도 안 되는 법. 근위병! 당장 시종장을 문 밖으로 모시고 가게!"
근위병들을 시켜서 시종장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말하고 있는 재상 레이몽드에게 다른 귀족들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같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기베르 대공마저도 할 말을 잃은 듯 레이몽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출전 전에 지휘 계통을 어지럽히는 의견이라고 해서 황명을 받은 자를 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 곳에 모인 신하들은 그런 어이없는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시종장마저 내칠 정도로 기세등등한 부르봉 공작에게 이의나 불만을 그 순간 제기한다는 자체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보시오, 부르봉 공! 그 사람은 황제 폐하의 어지를 들고 태자 전하께 고하러 왔소. 어찌 이런 망극한 짓을 한단 말이오!"
역시 그런 상황에서 바른 말을 한 사람은 부르고뉴의 랑베르 대담공이었다. 그러나 마치 그런 반발이 나올 거라고 예상이나 한 듯이 레이몽드 공은 랑베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소이다."
"…?!!"
"전하께서는 당파를 아실 필요가 없소. 또한 대법관과 파트리키우스를 아실 필요도 없소.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이 아실 필요가 없소이다."
그 말에 조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의자에서 일어서려 했다.

지금 제국의 황위 계승자를 앞에 두고 저 따위 소리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예 프랑수아 면전에다 대고 '태자는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세 가지를 알 필요는 없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랑 똑같지 않은가.

"……."
프랑수아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로 올린 손의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조슈아의 눈에 비쳤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질 정도였다.
'프랑수아… 저 녀석….'
지금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이나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참는 프랑수아의 모습에 조슈아는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치밀어 오르는 레이몽드 공작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면서 조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이몽드를 노려보았다.
-끼이익!
의자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모두들 조슈아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 소리에 레이몽드 공작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
평소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던 그의 성격을 억누를 정도로 반골(反骨) 기질이 발동한 조슈아는 통렬하게 레이몽드를 향해 말했다.
"방금 레이몽드 공께서 태자 전하는 세 가지를 아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재상 각하께선 세 가지를 아실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그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건들건들한 태도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가며 말했다.
"각하께선 신하의 본분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염치를 아실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싸가지를 아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역시 조슈아의 특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듣는 사람을 한없이 열 받게 만드는 말투가 레이몽드에게도 통했던 듯했다. 설마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제국 제상 앞에서 일개 백작이 자신을 능멸하는 말을 할 줄은 레이몽드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 가… 감히…."
그 완고한 표정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해질 정도로 분노한 레이몽드는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조슈아를 노려보았지만, 정작 조슈아 쪽은 할 말은 해서 홀가분한 듯해 보였다.오히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어디 감옥에 처넣으려면 넣어보든가'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허세까지 부리고 있었다.
일국의 재상과 일개 백작이 어전 회의에서 살기를 띠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형국은 과히 좋지 않은 법… 기베르 대공이 분위기를 진정시키면서 그들 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재상 레이몽드는 여전히 맘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조슈아를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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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그 백작 놈이…!"
분하다는 듯 노기를 띤 얼굴로 책상을 내려치자 책상에 놓여 있던 잉크병이 쓰러졌다. 그만큼 화가 나 있는 레이몽드 백작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앙주(Anjou) 백작 샤를 드 부르봉(Charles de Burbon)는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몰랐다.
"그 '역적의 자식'인 태자는 물론이고 그 건방진 애송이 녀석도 없애야 해! 사자왕의 아들이건 뭐건 간에 말이야! 알비온 촌놈 주제에 감히…."

당시 유리피디아 대륙 본토의 왕후장상들은 몇 백 년을 통틀어 알비온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미텔유리피아(Mitteleuripia [중부 유리피디아] : 유리피디아 대륙의 중심이란 뜻이며 보통 역사의 중심에 위치한 무대의 의미로 쓴다)에서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이 변방의 울티마 툴레(Ultima Thule)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만들어 살아오던 섬나라인 알비온은 본토에 있는 귀족들의 눈에는 단지 '양털이나 팔아먹고 사는 별 볼일 없는 촌구석'이란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 동안 많은 영웅과 왕들이 알비온에서 그 이름을 떨쳤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마음껏 조슈아와 프랑수아 태자에 대한 매도를 내뱉고 있는 레이몽드를 달래보려는 듯 샤를은 화제를 돌렸다.
"조만간 큰아버님 생각대로 되실 겁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코 앞이니 끝나기 전까지는 참으심이…"
"끄응…."
"그러고 보니 큰아버님, 이 조카가 한마디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무엇이냐, 샤를?"
"솔직히 숙부께서도 이번 원장이 승산이 없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
재상은 그의 그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샤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숙부께서는 에르퀼 그 녀석의 계획대로 무리하게 이번 원정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 샤를."
레이몽드의 표정에서 샤를의 말에 적잖이 동감한다는 듯한 표정이 비쳤다. 하지만 그는 뭔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아이, 에르퀼은 말일세, 기욤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네."
"…네?"
순간 샤를은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머리에 떠올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는 예전의 기억의 늪에서 그 이름을 건져 올렸다.
"기욤이라면…."

기욤 조르주 가스파르 드 부르봉(Guillaume Georges Gaspard de Bourbon). 이미 죽은 레이몽드의 장남이자 에르퀼의 아버지, 부르봉 백작이자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중장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기욤은 청년기 시절에는 레이몽드의 자랑이라고 할 만큼 장군으로서의 재능이 촉망받던 인재였었다. 다만 기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끊일 줄 모르고 평지풍파를 일으키곤 하는 그의 엽색 행각과 스캔들… 어지간한 도를 넘어선 그의 바람기는 아버지인 레이몽드도 어떻게 고치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레이몽드는 기욤을 에노트리아의 수상 자유 도시 베네톨리스(Venetolis)의 외교관으로 보내어 국내의 여론에서 피하게 해주었고, 기욤은 분통을 터뜨리며 에르퀼과 부인 루이즈(Louise)를 버려둔 채 베네톨리스로 휑하니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그 도시의 코르티자나(Courtigiana)들과 염문을 일으키며 축첩을 일삼던 기욤은 결국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베네톨리스의 세나토(Senato:원로원) 소속의 한 의원의 아내와 통정(通情)한다는 소문이 도시 전역에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네우스트리아 이방인을 환영할 리가 없는 이 도시에서는 참으로 베네톨리스답게, 그리고 에노트리아다운 방식으로 기욤에게 그 엽색행각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어느 날 곤돌라가 떠다니는 다리 밑에서 그가 물 위로 시체가 되어 떠오른 것이었다.
가정에서의 기욤의 차가웠던 모습, 그리고 그가 이국에서 당한 어이없던 최후를 알게 된 에르퀼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증오가 뒤섞인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 후 에르퀼은 점점 음침한 성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음탕하고 육욕을 밝히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몰라도 에르퀼은 점점 여성에 대한 육욕을 품지 않는 성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뜻은 아니고 - 전의 알루에트에 대한 에르퀼의 관심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자, 상대방에게 '인식' 내지는 '인정'을 받고 싶다는 소망에 따른 반응이었다 - 그런 육욕을 없애버린 대신, 에르퀼은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명예와 지위, 그리고 사람들의 찬사에 집착하는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번의 전쟁을 통해서 에르퀼은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한없이 받아왔지만, 정작 아버지가 에르퀼 자신에겐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찬사'와 '인정'을 아버지 대신 모든 사람들에게서 받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난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네…."
샤를도 기욤의 그 엽색 행각 때문에 에르퀼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에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정적으로 반박을 못하는 것일 뿐이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틀리다.
그래도 샤를은 설마 한 제국의 재상인 레이몽드 공이 고작 손자 녀석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 수만의 군사를 헛되이 전쟁의 참화로 밀어 넣으려고 할 만큼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노망난 노인네는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레이몽드가 자신의 숙부라서 샤를이 그렇게 변호하는 생각을 하는 건 물론 아니다. 한 제국의 재상으로서 황제 폐하의 권위를 대신할 만큼의 위세를 부리는 지위에서, 그런 인정에 끌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번 원정에서 레이몽드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여기에 불려온 게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샤를은 말없이 레이몽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샤를, 내가 너에게 하나 지시를 내리마."
"네, 숙부님. 뭐든지 하명하십시오."
"너도 알 거다. 내가 단지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런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역시 생각대로였다.
"그래서 태자를 이번 원정에 동행해야 한다고 주청을 드린 것이야. 그런 고로 네가 태자 '전하'를 수행하도록 해라."
"…!"
갑자기 태자 '전하'라고 어색하게 칭호를 붙여 말해주는 재상의 모습에 샤를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재상은 샤를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오직 너와 나만이 알아야만 한다."

… 샤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5-



"이번 싸움은 힘들 거 같은데요, 바르토르 경."
비공함의 갑판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조슈아가 꺼낸 말에 출항 준비를 서두르는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던 바르토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힘들겠다고요, 이번 싸움이."
이제 몇 시간 후면 라르크 앙 시엘 요새로 떠나게 되는 조슈아는 포룸 크리스토포루스(Forum Christophorus : 크리스토퍼 광장) 제국 비공정 함대 기지의 너른 광장에 정박해 있는 비공함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네우스트리아 제국이 역대 치른 전쟁을 통틀어 최대 수의 전함이 지금 여기 비행장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조슈아가 상파뉴 백작과 제국군 대장의 지위를 얻고 나서 배정받은 기함인 「투아하 데 다난(Tuaha De Danan)」도 출정을 위해 지금 밑에서 병사들이 장비, 군량을 옮겨 싣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슈아 각하께서 이 비공함을 배정받으실 때 왜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겁니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그거야 조슈아 공 마음이니까 제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좀 특이하지 않잖습니까?"
조슈아는 바르토르의 그 질문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께서도 아실 겁니다. 투아하 데 다난… 울티마 툴레 서쪽의 바다에서 이곳 유리피디아로 망명한 신다르 종족의 이름이잖습니까?"
"맞아요. 여신 다누의 일족들이란 뜻이었죠."
그렇게 대답하며 바르토르는 씩 웃으면서 조슈아의 어깨를 툭 쳤다.
"뭐, 하긴 그러고 보니 우리 함대도 다누 여신님이 있긴 하군요. 하하."
분명 조슈아의 부관이자 그의 함대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제 13함대'의 마스코트, 그리고 아키텐의 아름다운 엘프 공주님인 알루에트를 지목해서 하는 말이리라.
그리고 그 엘프 공주님을 위해서 조슈아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도 바르토르는 알 수 있었다. 역시 겉으로 보는 것과는 틀리게 조슈아 경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바르토르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조슈아도 긍정하는 의미인 듯 그냥 싱긋 웃어 보이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펼쳐진 비공함의 본체 메인 프레임 부분을 올려다보았다. 기체 옆에 달려 있는 거대한 네필리움 판을 고정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마치 조슈아를 짓누를 만큼 커다란 위용을 이루고 있었지만 조슈아는 자기가 마치 공학자라도 되는 양 구조를 분석하려는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에 한 번 '독토르 미라빌리스(놀랄 만한 박사)' 도미노 르블랑이 조슈아에게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이 ‘하늘을 나는 배’들의 역사는 적어도 3~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유명했던 연금술사 중에 오리엔티스 지방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출생한 다크 엘프(Dark Elf) 종족 출신의 알 하젠(Al Hazen)이란 인물이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알 하산 이븐 알-하이삼(Al-Hasan Ibn Al-Haytham)… 다크 엘프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르트 이페리아의 지배층에 속한 인물 중 하나였다.
이 학자가 어느 날 유리피디아에서 입수한 재료들을 실험하던 중 우연히 플라스크를 덮어놓으려 올려둔 한 광석이 병 입구에서 공중으로 떠오른 것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그가 플라스크를 덮어놓고 열을 가하자 그 열이 광석에까지 전달이 되어 일어난 현상이었다고 한다. 알 하산은 열에 의해 깃털같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이 광석의 이름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이름을 따서 네필리움(Nephilium)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이 광속은 50년 후에 유리피디아에도 전해졌다.
그 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 광석은 열뿐만 아니라 마력의 흐름을 통해서도 부상력(浮上力)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발견은 군사와 무역, 항해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쳐 지금의 비공정, 비공함의 시대가 오게 된 것이었다.

네필리움에 마력을 가하는 방향에 따라 상하, 좌우, 전후의 6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리를 응용, 비공정은 그 기다란 기체 자체에 일정 크기 이상의 네필리움 패널을 고정하여 공중으로 부상함은 물론 방향까지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보완하기 위해 프로플롭(Profloppe)을 달아서 추진력과 방향 제어를 동시에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비공정의 군사적 개량형인 비공함(飛空艦)은, 하늘을 빠른 속력으로 날 수 있게 몸체 자체는 유선형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커다란 기체에 복도와 방, 갑판 등으로 이루어진 다층의 구조물을 포함시켰을 뿐 아니라 마력포를 기체의 주위를 따라 배치시켰고 앞부분에는 공성추(攻城椎 : Battering Ram)를 연상하는 뾰족한 구조물과 함께 대함용(對艦用) 마력포도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문명의 공학과 마력학, 마술과 과학의 결정체…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경제 사회적인 부산물인 비공정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더욱 더 발전해 버린 비공함의 기술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 함대의 승리의 상징인 비공함이죠. 정확히는 조슈아 공께서 타고 계시니까 승리의 상징이겠지만. 부디 같이 타고 있는 저도 이 비공함과 함께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그걸 확실히 보장은 못해드리겠는데요.”
“언제 공께서 말로 보장하신 적이 있던가요? 직접 보여주셨지.”
말 자체는 비아냥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바르토르는 상당히 조슈아에게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바르토르 뿐 아니라 조슈아의 함대 소속의 병사들도 조슈아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전의 비프로스트 공략전 때 한 명의 피도 흘리지 않고 그 무적의 요새를 점령했던 걸 자신들의 눈으로 봤는데 없던 믿음도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작 조슈아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병사들과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내키지 않는데다 전망도 좋지 않아 보이는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 전략을 짜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요 며칠 전부터 머리를 쥐어짜고 있어서 그것이 그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자신은 이제 예전의 알비온 군관이 아니다. 역사학도를 꿈꾸고 있었던 백수도 아니었다.
“공께서 지금 역사를 만들고 있는데 굳이 역사를 연구할 이유가 있습니까?”
후세에 역사서의 한 장에 어떤 내용으로든 기록될 전쟁에 참여하는 네우스트리아의 상파뉴 백작이자 자신의 함대까지 가지고 있는 대장의 위치에 있는 장군이다. 게다가 자신의 명령 하나에 수천 명의 병사들의 생사가 달려 있고, 또한 장교들의 목숨도 달려 있는 것이다.
특히 알루에트 공주님… 이번 전쟁에서 그는 되도록 그녀를 놓아두고 가고 싶었지만 알루에트 공주님은 부관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바득바득 우기면서 이번에도 조슈아 옆을 보좌하게 되었다.

'적어도 이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만은 지켜 주고 싶다…'

그게 조슈아의 바램이었다. 이번 싸움의 승리와 패배는 관심 없었고, 그는 소박하게나마 그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연신 속이 타는 마음에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마 이런 그의 마음을 알루에트가 안다면 틀림없이 감동하며 황홀해 할만 했지만, 조슈아는 굳이 그녀에게 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진 않았다.
다만 그런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한 바르토르만이 씩 웃으면서 옆에서 조슈아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면 이 전쟁의 희생자라도 줄여야 하니까.'


-*-



"네우스트리아 군이 움직였다는 군요."
피렌체 공 프란체스코의 말에 발렌시아 추기경이 창 밖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거대한 헛수고의 시작이로군요."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추기경에게 프란체스코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굳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추기경 예하? 이번의 네우스트라아 군의 규모도 규모지만 지난 두 번의 승리로 인해 사기도 올라 있는 상태라…."
"바로 그거 때문에 문제인 겁니다, 대공."
추기경은 모자를 쓰지 않아서 저절로 눈썹 부분까지 흘러내린 그 검은빛 머릿결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네우스트리아에서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있는데, 지난 두 번의 승리는 '저의 동생'이 거둔 승리이지 네우스트리아가 거둔 승리는 아닙니다. 그건 매우 큰 차이이죠."
"그건 그렇죠."
"이것은 중요한 겁니다. 네우스트리아가 자신들의 힘에 대해서 오판을 하는 것이에요. 자고로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의 실정을 모른 채 아군의 전력만 알고 싸운다면 한 번 이긴다면 한 번은 집니다. 만일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전력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는 법… 네우스트리아는 지금 그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합니다."
"호오…."
그 말에 프란체스코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에노트리아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요?"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좋겠죠."
추기경이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 한 쪽이 불리한 위치가 될 때 우리 에노트리아에도 도움을 요청하게 될 지도 모를 겁니다. 그때 나서도 늦지 않지요."
"역시 네우스트리아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까요?"
그 말에 추기경이 자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그 검은빛 눈동자로 프란체스코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적어도 그들이 불리해 할 때 먼저 나서는 거보다는 우리 몸값을 올리고 나서 도와주는 게 더 좋지요."
"흐음… 그러고 보니, 추기경 예하의 '아버님'께서 이번에 나폴리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시려고 하는 것 같던데…."
추기경은 그 말을 듣자, 순간 불쾌한지 눈초리가 매서워진 채 프란체스코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오, 피렌체 공."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호수의 주교(Archbishop du lac)'이신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성하(聖下)께서는 예하의 아버지이시지 않습니까?"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추기경의 이름을 불렀다.
"…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공."
그 이름을 듣고 추기경, 아니 체사레는 픽 하고 웃으면서 한탄하듯 말했다.
"그 빌어먹을 마라노(Marrano) 녀석의 패밀리 네임을 달고 살아야 하다니…."

마라노라는 단어는 그 당시 유리피디아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피길 델 트라디멘토(Figli del tradimento)', 즉 반역의 자손이라고 불리는 유대인들 중 이스파니아에 살고 있던 이들을 멸시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특히 에노트리아의 유란드에서 알렉산데르 교황과 적대하고 있던 추기경과 귀족들이 이스파니아 출신의 알렉산데르를 멸시하기 위해서 부르는 별명이었기 때문에 이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사레가 입에 올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난 명목상 그의 아들도 아니라 '조카'요. 하긴 나랑은 아무 혈연관계도 없긴 하지만서도."
알렉산데르는 교황이기 때문에 성직자의 규율에 의해 자식과 처첩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뻔뻔하게 가지고 있다.
알렉산데르가 지금까지 갈아치운 첩만 해도 4명이 훨씬 넘는다. 단순히 하룻밤 즐기면서 육욕을 불태운 여자라면 그것에서 100배는 더 넘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생긴 자식은 당연히 사생아 취급을 받게 되었고 또한 교황은 자신의 자식을 '조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체사레는 지금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이었다. 자신은 보르지아의 자손이 아니라고.
"그래요. 요새 성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나폴리 공략에 바쁘시겠죠?"
"그거도 바쁘지만 여전히 매일 저녁마다 '연회'를 베풀기에 더 바쁘시죠."
연회라는 말의 의미가 요새는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술과 고기를 포식하며 즐기면서 엄선한 창녀들과 같이 밤새도록 난교(亂交)를 하면서 육욕을 불태우는 향락의 구덩이'라는 의미로 쓰이던가… 라고 체사레는 피식 웃으면서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는 교황이란 작자는 제단에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는 그 제단 위에서 수녀와 육욕을 불태우고 있고, 또한 손가락으로 묵주를 굴리며 기도를 하는 것보다 미사를 드리러 온 귀부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것에 더 열중해 있지 않은가.
"문득 아사시(Asasi)의 성 구이도(Guido)께서 한 말이 생각이 나는군요. … '교황 성하께서는 무릇 처음 유란드에 교회를 세우시고 순교하신 성 란셀롯을 계승하셔야 마땅하시나, 소승이 보기엔 요즘의 성하들께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계승하고 계십니다' 라고 말이죠."
게다가 그것에 멈추지 않고 알렉산데르 교황은 선대 교황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에 대한 욕심까지 있어서 이번에는 나폴리 왕국에서 영토를 어떻게든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다.

사실 그 영토에 관한 건은 체사레에게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어차피 자기가 꾸밀 모종의 일에 도움이 될 테니.

"뭐, 그 연회야 그 양반의 고질적인 취미 생활이고 여전히 '영토'라는 말도 입에 달고 사시죠. 뭐, 일단 그 때가 되면 네우스트리아에서 뭔가를 뜯어낼 핑계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체사레는 그렇게 논평하면서 말했다.
"과연 '제 동생' 조슈아는 네우스트리아가 우리에게 손을 벌리기 전에 어떻게 대처를 할 지 궁금하군요."


-*-



처음 전투는 로잔느(Lausanne) 부근이었다.
네우스트리아 제국군이 엑스 라 샤펠에서 출발하여 중간 도착지인 라크 앙 시엘 요새에서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해 그 곳에 오를레앙 대공 기베르 공과 참모장 에르퀼 백작 외의 참모 본부를 내려두고 유란드라 제국 영토로 진격한지 며칠 째… 비록 소규모지만 정식적으로 두 제국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예상대로 레오폴트 경이 이끄는 본군이 나타나진 않았다.
물론 조슈아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전쟁에서는 최대한 오랜 시간을 끌어서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들어서 싸우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는 전쟁에서는 공격자가 수비자보다 몇 배나 불리한 것이다.
그래도 지금 그 전제 자체가 통용이 안 되는 상황이니만큼 조슈아는 지금 상황에서 최대한 최선을 다하는 것밖엔 없었다.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근교에서 또 한 번의 전투가 있었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싸워보려고 하는 건가 보군."
조슈아는 그렇게 입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건 단지 정찰을 할 겸 싸움을 건 것일 거라고.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 때 아우구스부르크를 수비하고 있던 군단의 지휘자는 뉘른베르크 백작 테오도르 경이었다.
‘흑색 질풍’이란 별명답게 칠흑의 기함을 몰고 전투에 임하는 테오도르의 수비가 견고한 것을 보며 조슈아도 감탄한 듯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이것도 역시 정찰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허투루 싸우는 모습은 적들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레오폴트의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슈아는 이번 전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쉬이 넘어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시도해 볼 건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슈아는 약간 무리하게나마 함대 전체를 전진시키면서 테오도르의 함대에 기습을 걸어 볼 생각을 했다. 이걸 통해서 혹여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레오폴트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그러다간 아군의 진형에서 헛점이 보이게 될지도 모르고, 또한 레오폴트가 여기로 나타날 정도로 이 곳이 전략상으로 중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걸 조슈아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곧 도시를 내주고 후퇴하는 테오도르의 함대의 정연한 모습을 보며 함대 전체에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을 금지했다.

"…바르토르 경."
"네?"
조슈아는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보통 남자가 숙녀를 유혹할 때 그녀가 물러서 버리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바르토르는 순간 '왜 지금 이딴 걸 물어보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과 함께 의구심을 가진 어투로 되물었다.
"저, 혹시… 요새 알루에트 공주님 말고 다른 아가씨랑 바람이라도 피십니까?"
그 말에 마침 조슈아에게 물을 가져오던 알루에트가 깜짝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 귀까지 토끼같이 쫑긋거리면서.
"아, 그게 아니라 유란드라 군이 생각보다 잘 유인이 안 되기에 한번 힌트라도 얻어 볼까 해서 물어본 거였습니다만."
"…미녀 아가씨를 꾀는 거랑 적을 유인하는 거랑 동급으로 생각하시는 조슈아 공께 감탄을 해야 할지 비난을 해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젓는 바르토르는 곧 피식 웃으며 조슈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보랏빛 눈동자와 날렵한 외모, 그리고 남자의 매력으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자타공인 플레이보이가 아닌가.
뭐, 유일하게 알루에트 공주님 같은 경우는 그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진 않지만 바르토르는 충분히 그걸 이해했다.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아가씨는 설사 에로스 신이 온다고 해도 어떻게 다른 남자가 유혹할 수가 없다는 건 자신의 연애 경험의 통계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굳이 하라면 못할 건 없겠지만 알루에트 공주님은 바르토르의 솜씨로도 흔들리지 않을 타입의 아가씨였다. 그에겐 유감스럽게도 말이다.
"뭐, 일단 상대방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마음에 안 들었거나 따로 꿍꿍이가 있어서 물러난 것이거나, 아니면 그것 자체가 유혹의 일환이거나, 뭐 그런 경우죠."
"흐음."
조슈아가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면, 그 아가씨는 결국 침대까지 끌고 가봐야 거기서 본색을 드러내겠군요."
그 말에 브릿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조슈아를 놀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
특히 알루에트는 조슈아가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얼굴로도 모자라 그녀의 기다란 귀까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조슈아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깨달은 듯 황급하게 변명을 했다.

"비유를 든 겁니다, 비유를. 유란드라 군이 따로 생각해 둔 전장에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해봐야 알 것 같다는 소리였는데…"
"……."
"아, 잠깐만요! 딴 사람은 몰라도 바르토르 경께선 무슨 자격으로 저를 그렇게 쳐다봅니까?"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바람둥이로 악명이 높은 주제에 '조슈아 경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저런 노골적인 호색한을 봤나?'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바르토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조슈아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잠깐만, 다들 내가 무슨 한 마리 홍학(紅鶴)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알루에트에게 약간 실망을 준 것 같다고 조슈아는 생각했지만 자신도 인간이지 않은가. 게다가 멀쩡한 젊은 나이의 청년인데… 이런 유의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데 대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설마 자기가 금욕을 서원으로 세운 도미니크 회 수도사라도 되는 줄 알고 있기라도 했었나?
"특히 바르토르 경이 그렇게 쳐다보니까 엄청나게 억울한데요?"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바르토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 좋은 건 알게 되서 다행이군요. 알루에트 공주님께 희망이 보이는 발언을 하신 거잖습니까?"
"네?"
"조슈아 공이 평생을 수도사같이 살았다는 루이 7세 폐하같이 금욕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니까 말이죠. 하하하."
"아, 그게 아니라 저…."
조슈아는 나름 그렇게 변명을 해보려다 알루에트와 눈이 마주쳤다.

"후훗."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알루에트는 조슈아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엘프 공주님은 그래도 속으로는 기뻤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모하는 남자가 그렇게 숙맥이 아니라면 분명 자신의 매력도 '욕망'을 가지고 보아줄 것이 틀림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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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아킴 | 2009/08/08 17:39 | 바람과 대지의 노래 | 트랙백 | 덧글(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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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환상진혼 at 2009/08/08 18:10
체사레 보르자.....아버지는 원래부터 맘에 안 들었죠
아들이야 원체 좋아했지만..

뱀발.마키아벨리 안나옵니까;;; 마키아벨리 좀 빠라서..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8/08 21:24
마키아벨리 당근 나옵니다 -_-)/ 체사레가 나오는데 그 양반이 안나올리가 없잖습니까 'ㅅ'/
Commented by jet at 2009/08/08 21:10
이로서 커플 1호가 탄생할 조짐을 보이는군요.
근데 아무리 권신이라지만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신하를 끌고 가라라고 말할수 있다는 건....
저 지경이면 벌써 왕가가 바뀌어야 했을 듯.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8/08 21:27
저 상황의 모델은 아시다시피 영조 말 정조 초의 정부를 약간 과장해서 묘사한 거죠. 정조 실록에서는 영조가 직접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정조의 외숙부가 명령을 받아적으려는 승지를 위협해서 못 적게 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숙종 때였다면 아마 바로 끌려나가서 목을 쳤을 겁니다.
암튼 저 레이몽드 양반도 저렇게 막나가면 끝이 좋게는 안 끝날 겁니다 -_-);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8/08 21:28
그리고 원래부터 조슈아와 알루에트는 러브러브합니다. 아직 에로에로가 안되서 문제지(....)
Commented by ダ-スケロロ at 2009/08/10 09:33
좋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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