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18일
Chapter 3 - 파비아 전투 The Battle of Pavia (4)




-6-


진정한 행운이란 테이블에서 최고의 카드를 쥐는 것이 아니다.
언제 일어서서 집으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진정한 행운이다.


- 존 헤이 John Hay



"파비아 Pavia 까지 약 2 리그 League 남았습니다."
지휘석 탁자 위에 걸터 앉아 있는 버릇은 죽어도 못 고치는 듯, 여전히 그런 불량한 자세로 조슈아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며 대형 스크린에 비친 파비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군사 요새는 아니니만큼 질릴 정도로 견고하게 되어 있는 성벽이 둘러싼 도시는 아니었다. 도시 가운데를 강이 가르고 있는데다 아름다운 건물들도 있는 도시다. 험악하게 보이는 도시는 절대 아니긴 한데… 문제는 저 안에 있다고나 할까.
"현재 파비아 시 안에 란트츠크네흐트 기사단 병력 8천이 결사적으로 수비를 펴고 있습니다. 농성전이죠."
직접 정찰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면서 FG (플레임글라이드) 를 타고 나갔다 온 바르토르가 보고를 하며 말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농성을 하더군요. 함대들도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대공포화를 퍼부어 대더군요."
"그래도 용케 살아 돌아오셨군요."
"뭐, 그럼 제가 죽기를 바라시기라도 하셨습니까? 귀공의 연애 라이벌이 한 명이라도 줄었으면 해서?"
"전 귀공의 폭넓은 취향을 따라가지 못하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가볍게 서로간에 악담을 하면서도 조슈아는 생각을 했다. 팔천의 병력이라… 상당히 미묘한 숫자였다.
분명 전략상 후퇴하기 위해서 후위를 맡기기 위해 남겨놓은 병력이라고 보기엔 성 안에 있는 숫자가 꽤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설마 이 병력으로 우리에게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남겨 놓은 건 아닐 터이고… 그렇다고 이 성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체스에서 우리 편 깊숙히 들어온 폰 Pawn을 끝까지 오게 뒀다간 퀸 Queen 으로 변하는 법.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도 여러 가지 가능한 수가 있으니 조슈아는 좀 답답했다. 그의 경우는 워낙 여러가지 수가 생각나기 때문에 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조슈아 자신에게 천재 장수느니 뭐니 말해도 정작 조슈아 자신은 그게 그렇게 좋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그 머리 때문에 상대방이 대응할 수 있는 별의별 경우의 수까지 머리에서 떠오르기 때문에 그거에 대한 대비까지 생각해야 해서 오히려 머리가 더 아프게 된다. 이른바 고생을 사서 하는 셈인 것이다.
조슈아 자신도 언젠가 세드릭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오히려 똑똑한 장수가 멍청한 장수보다 상대하기 쉬운 경우가 있단다. 그들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오히려 예측이 더 쉬운 편이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거든."
그때 세드릭이 뭐라고 했었던지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났지만 아마도 "그건 아버님 같은 천재에게나 해당하는 소리겠죠." 비슷한 소리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슈아는 한동안은 라르크 앙 시엘에서 전해질 대본영의 지시를 우선 따르기로 했다.
'혹시나 모르니, 내 특기를 발휘해 볼까….'
미리 최악의 지점은 그래도 짚어두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게 조슈아 자신이 타고난 특기가 아닌가.
그것이 그다지 환영은 받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

'네모 프로페타 인 파트리아 Nemo profeta in patria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



"파비아를 점령하라는 대본영의 방침이 있긴 했지만 지금도 전선 상황은 지지부진해요, 형님."
프랑수아 태자의 말에 조슈아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께서 이번에도 파비아 성을 무혈 입성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라르크 앙 시엘 성같이 말이죠."
"글쎄요."
조슈아는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태자 전하, 제 이름이 여호수아 Joshua 라고 해서 여리고 Jericho 성을 아무 때나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의 여호수아 서 5장의 내용에 비유하며 조슈아가 대답했다.
"태자 전하, 아무리 완벽한 방비를 갖춰도 방심하고 있는 요새는 쉽게 점령할 수 있어도 저렇게 결사적으로 싸우는 요새는 제가 신이 아닌 이상 쉽게 점령을 할 수는 없답니다. 황공합니다, 태자 전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형님. 워낙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물론 알고 있었다. 프랑수아 태자 전하께서 저렇게 답답해하는 이유를.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태자 전하, 제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파비아의 점령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째서요?”
“이건 일종의 늪입니다.”
“늪이라고요?”
조슈아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지 언뜻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태자가 되물었다.
“네, 분명 우리가 여기서 긴 시간을 두고 공성전을 치루고 있는 동안 빈도보나에서 그들의 본대가 이곳으로 출발했을 겁니다.”
조슈아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하나씩 짚어 나갔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를 점령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동안 유란드라 군이 우리 군을 포위하게 된다면 파비아 성과 그들 사이에서 양쪽으로 압박을 받는 형국이 됩니다. 또한 만일 제가 저 파비아 성을 용케 접수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더 큰 문제를 부르게 됩니다.”
“왜 그렇죠?”
“우리 군이 체스에서 말하는 외통수 Checkmate 에 걸리게 되어 버리니까요.”
어차피 파비아 성을 점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유란드라 군이 그 동안 이 부근을 포위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아군이 파비아에서 농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뒤의 후위 부대와 끊겨 버린 채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를 일단 포기해야 합니다.“
“네?”
조슈아의 말에 프랑수아는 언뜻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굳이 이곳을 점령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8천의 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아요. 지금 우리 군은 고작 8천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오기로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건 적 쪽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포위전으로 점령한 파비아를 바탕으로 다른 지역으로 서서히 뻗어나가면…”
"베수비오스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도시 앞까지 와서야 폼페이를 떠날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 낙관적인 전망은 기대 안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조슈아는 그렇게 말하며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둬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다음 말에 힘을 주었다.

“잊지 마십시오. 여긴 적지입니다, 태자 전하.“



-*-



"재상 각하, 전에 저희가 보낸 서신에 대한 유란드의 교황청에서 보내온 답변입니다."
"아, 그런가? 이리 주게."
보좌관이 가져다 준 봉투는 교황청의 문장 Crest 인 「성 란셀롯의 열쇠 Le chiavi di San Lancellotio」이 찍힌 인지로 봉해져 있었다. 결국 답변이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몽드 공작은 편지를 읽어보았다.

'전에 요청하신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번에 교황 성하께서 나폴리 왕국 원정을 하는 데 있어서 귀 제국에 대해서 협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만일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으로 귀국이 요청하신 귀국의 원정에 대한 반대 회칙 Encyclica 을 공표하지 않을 것이며 신성 유란드라 제국의 선제후들 중 대주교들에 대한 '적절한 지시'를 내리실 것입니다. 성하의 제안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하시고 답변을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편지 끝에는 교황의 콘술토레스 Consultores (자문위원) 로렌초 캄페지오 Lorenzo Campeggio 추기경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의 요청에 대해서 반대 급부를 요청하는 것이로군… 레이몽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유란드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정복 사업에 한창이군."
역대 교황들치고 안 그런 이가 어디 있었을까만은 알렉산데르 6세 경우는 특히 도가 지나친 것 같다고 레이몽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협상을 할 때는 철저하게 하는군. 자신은 입만 뻥끗해주고 우리가 보상해 주는 것은 군대의 파견이라….'
그래도 그 제안 자체는 상당히 검토해 볼 여지가 있었다. 일단 원정을 함에 있어서 교황의 태도에 따라서 주위 군소 국가가 혹시 모를 개입을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이득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의 파문 위협에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은 이상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왕후장상들은 없으니까 말이다. 옛날에 그 사건도 있지 않았던가. 카노사의 굴욕… 그 사건 이후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도 교황의 말에 대놓고 직접적으로 대응을 할 수가 없게 될 정도로 교황권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교황을 우리 제국 편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몽드는 말했다.
"좋아. 답변을 보내도록 하지."
교황이긴 하지만 유대놈들같이 철저한 장삿꾼인 작자다. 그런 자가 과연 얼마의 병력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제 실제적인 사항을 정하기 위해 레이몽드는 네우스트리아 군대의 구성표를 가져오라고 시종들을 시켰다.


-*-



"첩자들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각하."
트리스탄의 보고에 레오폴트는 쳐다보고 있던 지도에서 눈을 떼고 그를 보며 말했다.
"어디서 온 보고인가?"
"엑스 라 샤펠과 호수의 도시 유란드, 양측입니다."
"모종의 협상이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그 양측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가에 대해서 첩자들이 알아낸 사항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그런데 말일세… 설마 지금 군대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나폴리 쪽으로 교황군의 원정을 도우러 갈만큼 네우스트리아 놈들이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혹시나 모르죠, 레오폴트 님."
트리스탄이 그렇게 대답하자 레오폴트가 잠시 고심하는 듯 얼굴 표정이 심각하게 짓다가 한 마디 말을 꺼냈다.
"교황이 혹여나 지금의 선제후들에게 빌미를 줄지도 몰라. 선제후들 중에 무려 대주교가 3명이야. 그들은 교황의 신하들이고. 안 그래도 선제후들에게 내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다, 교황까지 대주교들을 선동한다면 좀 곤란해지지 않겠나? 함부로 판단하긴 곤란하군."
그리고 레오폴트는 결심했다는 듯이 마주보고 서서 지도를 보고 있던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밤베르크 공."
그 말에 빈센프 경이 레오폴트를 바라보며 딱 한 마디를 했다.
"야볼 Jawohl (네) ."
직접 말을 걸어도 '야볼 Jawohl', '나인 Nein' 이 두 마디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빈센트에게 이젠 익숙해졌는지 레오폴트는 그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공에게 임무를 하달합니다. 중요성이 크죠. 지금 네우스트리아 군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아까 전에 트리스탄 경의 보고를 같이 들으시면서 아셨을 것입니다."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나폴리 왕국까지 신경쓸 만큼 오지랖이 넓은 이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자기 주제부터나 우선 알라고 깨우쳐 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임무를 귀공께 맡기겠습니다."
어찌 보면 본 싸움과 관련없는 지엽적인 임무이다. 에노트리아로 일부 차출될 네우스트리아 군을 중간에서 붙잡아야 한다는 그런 전투라면 본 전투와는 상관이 없는 임무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허투루 일개 보통 장수에게 그 임무를 맡길 수는 없다. 만일 그 파견되는 네우스트리아 군의 지휘관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면 - 만일 조슈아라는 그 작자라면… 이라고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 오히려 본 전투 전에 패배의 소식부터 먼저 듣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확실히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보통 장군들이라면 잘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 공 같은 경우는 불평불만 하나 없이 지금 레오폴트의 명령에 곧바로 따르겠다는 듯 경례를 하고 예의 그 뚝뚝 끊기는 대답을 했다.
"최선… 뒤… 파비아…."
그리고 경례를 마치고 나가는 빈센트 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르틴 경이 말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할 터이니 뒤를 부탁드립니다. 파비아에서 뵙지요… 이렇게 말하고 가는군요."
"…."
도저히 저렇게 문장이 도출되는 알고리즘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은 레오폴트는 다시 지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지도에서는 실시간으로 함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환영으로 떠있는 채 비쳐보였다. 그 함대의 환영은 지금 한 화살표를 따라, 지금 레오폴트가 있는 기함을 포함해 유란드라 제국군 본대가 움직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파비아. 레오폴트는 파비아에서 결판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과연 그 '사기꾼'은 어떻게 나올까요?"


-*-



"뭐가 어쩌고 어째요?"
랑베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어 보았지만 기베르 공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조정에서 교황청과 조약을 맺은 셈이요. 9천의 병사와 그에 맞는 함정을 척출하여 나폴리의 교황군과 합류하라는 지시오.”
“9천이나요?”
그 정도라면 거의 함대 하나 정도가 통째로 빠져나가는 정도다. 그만한 병력을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 곳으로 빼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정부쪽에선 우리가 파비아에서 지지부진하다는 건 알고 그따위 지시를 내리는 게 맞는 거요?”
“어쩔 수 없소. 상대측도 좋은 조건을 걸었다지 않소?”
“….”
좋은 조건? 여기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조건인데 뭐가 좋은 조건이란 말인가… 랑베르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아가면서 말했다.
“오를레앙 공.”
“말씀하시오, 아키텐 공.”
“공께서는 그 명령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
오를레앙 공도 자기가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안 났던 듯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떼었다.
“견해가 있어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 같소?“
“…….”
“랑베르 공….”
오를레앙 공작이 말했다.
“어쩔 수 없소. 일단은 황명이지 않소?”
“황명이라….”
엄밀히 말하면 황명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랑베르는 혀를 차며 말했다.
"좋소. 그럼 소관이 직접 가겠소."
"랑베르 경, 그렇게까진…."
"아니오. 직접 내가 가서 해결하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소."
속은 끓어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그도 믿고 있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소관이 자리를 비워도 노르망디 공을 보좌할 인물이 있소. 맹해 보여도 믿음직한 친구지요."
그 친구라면 자기가 없어도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다. 그럴 의욕만 있다면.


-*-



"괜찮으시겠습니까, 아키텐 공?"
인원 차출을 위해 부관들과 의논을 하는 걸 마치자마자 입전되어 들어온 조슈아의 통신을 받으며 랑베르가 답했다.
"물론이지, 이 사람아.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겐가, 하하."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도 랑베르가 에노트리아에서 교황군을 도와 나폴리를 점령할 응원군을 이끌게 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영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아니면 차라리 제가 가는 것이…."
"아닐세.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태자 전하를 지켜야만 하네. 그러니까 여기 남아있게."
랑베르는 조슈아에게 꼭 중요한 일을 당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이 의욕 제로의 장군인 조슈아 백작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 백작, 그만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자 전하의 신변을 보호할 거라고 랑베르는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 아닌 태자 전하의 형이니까 말이다.
"이번 건은 내가 직접 처리하고 나서 저 망할 레이몽드 영감이랑 나중에 담판이라도 지을 생각이니까 말일세. 자네는 걱정 말게나."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
조슈아는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키텐 공이 자기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도 지금 절절히 느껴졌고, 그가 태자 전하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가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키텐 공은 스스로 자원해서 에노트리아에 전망도 없는 싸움을 하러 가고 있다. 조슈아 자신같은 애송이 장수 대신에 말이다. 그런 그에게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
"아닐세, 금방 끝내고 올테니 내 몫은 남겨두게나. 자네가 워낙 뛰어난 친구라서 내가 올 때까지 유란드라 놈들이 자네 함대의 공격에 남아날 지가 걱정이 되네 그려."
"하하…."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랑베르의 말에 조슈아도 씨익 웃었다. 랑베르도 마치 친아들 같은 조슈아에게 신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조슈아도 마치 아버지같은 랑베르 공을 신뢰의 웃음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에르퀼 그 애송이 녀석도 돌아오면 손을 좀 봐줄 생각이네. 말을 들어 보니 가관이더구만. 우리가 왜 여기에 죽치고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면 자네도 노할 걸세."
"이유가 뭐랍니까?"
"별다른 게 아니라 이제까지 별다른 성과도 없었는데 여기서라도 한번 대차게 실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 원 참…."
그 말에 조슈아는 순간 표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 한 5만 명은 죽어야 만족하겠다고 하덥니까, 그 친구가?"
"아마도 그런 것 같네.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그렇게 말하고 랑베르도 씁쓸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통신을 끊었다. '태자 전하를 부탁하네.'라는 말을 남기고.
조슈아는 한참을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 그 부르봉의 개새끼가 정말 사람을 열받게 하는군."
"!!"
그게 에르퀼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레이몽드 재상을 지칭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알루에트는 조슈아의 입에서 나온 그 과격한 말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조슈아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아니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조슈아의 입에서 저런…
"…? 아, 죄송해요, 알루에트 씨."
그제서야 조슈아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가를 뒤늦게 깨닫고는 그 자신도 놀라서 알루에트에게 황급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바르토르의 말은 훨신 더 과격했다.
"조슈아 공, 저는 그 '실크 양말을 신은 똥덩어리 merde dans un bas de soie' 가 왜 그렇게 나대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그 똥덩어리 merde 의 발음을 '메','르','드'라고 딱딱 끊어 말해서 훨씬 모욕감을 극대화한 말투로 말하면서 바르토르는 계급 상으로 한참 위인 상관을 당장에라도 결투 신청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모욕적으로 지칭하며 말을 이었다.
"안 그렇습니까? 말하자면 카드 게임에 이제까지 레이스를 해서 판돈을 끝갈데없이 올려놨더니, 어디서 온 타짜가 다른 패도 아니고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로 한 방에 쓸어가 버렸으니 말이죠. 그것도 유리피디아 최악의 사기꾼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으니 말이죠. 아마 이번에는 이기고 싶어서 판돈을 처음부터 크게 올린 걸 겁니다."
"당한다면 상당히 열받을 만한 상황이겠군요.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거 같은데요."
그의 비유에 별다른 감흥 없이 답하는 조슈아에게 바르토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니, 이해하긴 뭘 이해하셨단 겁니까? 나 원 참… 그 사기꾼이란 자가 바로 조슈아 공이란 겁니다. 그래서 에르퀼 그 작자가 그렇게 나대는 거란 말입니다."
"… 제가 그렇다는 겁니까?"
예상 밖이라는 조슈아의 반응이었다.
"아, 뭐 그러라고 하십시요. 누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짓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십니까? 단지…."
"아니, 그러니까 그 인간이 더 조슈아 경을 신경 쓰는 거라니까요. 죽어라 노력하는 자기가 의욕 제로의 조슈아 경에게 밀리는데 얼마나 머리에 불이 들어오겠습니까?"
"뭐…."
예상이야 했다지만 자신에게 이렇게 적이 많이 늘었을 줄은 몰랐다.
평소 성격이 적을 만들기 꽤 쉬운 성격인 것은 자기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맘에 안 들면 바로 상대방을 까대는 성격상, 그가 생각해도 자기는 적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조슈아는 자연스럽게 알루에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알루에트는 조슈아의 복잡한 속을 알지 못하는지 그런 그에게 예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이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야… 나쁠 건 없는데….'
그 순간 조슈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그에겐 그 이유만 있어도 충분했다.


-*-



피오렌추올라 Fiorenzuola 부근의 공역에서 빈센트의 함대는 일단의 비공정 무리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비공정에 그려진 네우스트리아 제국의 표시에 빈센트는 그들이 나폴리로 향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임을 짐작했다.
여전히 별다른 지시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채 빈센트 경은 조용히 손짓으로 전진을 하라는 제스쳐를 했다. 몇 년 동안 옆에서 그를 모셔온 경험이 있는 참모들은 그 지시를 이해하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성공입니다!"
네우스트리아 쪽에서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듯했다. 빈센트 경의 함대가 우측에서 내습을 해 오자 바로 진형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와아!"
기습이 성공했다는 것에 빈센트 휘하의 부하들은 고무된 듯했다.
"…."
그러나 정작 빈센트 경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일단은 전진을 늦추라는 손짓을 했지만, 유란드라 제국군의 일부 함정은 상대방의 흐트러진 진형 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공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
빈센트는 묘하게 흐트러진 가운데 점차 이상하게 진형을 만들고 있는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보고 뭔가가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전진을 멈추는 손짓을 했지만,
- 쾅!!!
"아군 진형의 우측 날개에 집중 포화입니다!!"
빈센트는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네우스트리아가 펼치고 있는 진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흐트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그 움직임은 유란드라 군의 눈을 속이기 위한 페이크… 지금 그 진형은 오히려 너무 깊숙히 침투해 있는 유란드라 제국군을 포위하고 있는 진형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젠 그들이 오히려 반격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저 친구는 이 사자의 표효를 들어보지 못했나 보군!!"
아키텐 공작 가문의 가언을 외치며 랑베르 공은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그렇게 쉽게 진형을 흐트릴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잖은가. 30년간의 무훈은 괜히 폼으로 쌓아 올린 게 아닌 것이다.
한편, 빈센트는 지금 포위에 갖혀 반대로 두들겨 맞는 처지가 된 아군의 활로를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략은 저 포위를 뚫고 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위되어 있는 이런 상황에서 진형을 정비하고 모이면 모일수록 그 동안 더 공격을 얻어맞을 뿐이었다. 차라리 포위 진형을 분단시키기 위해 돌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유란드라 군은 마치 화살같이 맹렬하게 네우스트리아 군의 중앙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하지만, 랑베르 공의 표정은 오히려 한층 더 밝아졌다.
"역시 저 친구, 유능하군 그래.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다니."
랑베르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것이었다.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았던 경우는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딱 두 부류였다. 상대방이 구제불능의 멍청이거나, 상대방이 바로 조슈아 경같은 괴물이거나….
다행히 상대방이 조슈아 경같은 괴물은 아니라고 안심하면서 랑베르 공은 오히려 중앙진을 갈라 유란드라 군의 앞에 길을 티워주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열어준 통로로 전진하는 유란드라 군의 옆으로 맹렬하게 포격을 퍼부으며 오히려 집중 타격을 입혔다.
바로 지휘선 옆의 함선까지 포격에 스러지며 침몰하는 모습에 빈센트는 순간 움찔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의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에겐 지금 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관에게 미리 지시한 수신호를 취하자 부관이 외쳤다.
"모든 함정은 그 상태에서 적군들과 그대로 전투를 속행하라!"
언뜻 들으면 상당히 무책임한 명령인 것같아 보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런 상황에서 진형을 재정비한다는 등 시간을 끌수록 적군의 집중 포화에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정작 아군의 수가 적군보다 절대적인 수로는 더 많다. 이 이점을 살리지 않는 이상은 상대의 수에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빈센트는 함정의 수 자체로 서서히 네우스트리아 함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서로 주고받는 마력포와 FG의 사격으로 파괴되고 추락하는 비공정들… 그 파괴의 현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서서히 수에서 밀리기 시작한 형세에 랑베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알비온의 란체스터 Lanchester 경이었던가… 그 친구의 말이 맞군."

알비온의 군사학자 중 한 명인 란체스터 공 제임스 시무어 James Seymour 의 주장에 의하면 비공정 함대의 접전에서 전력의 비율은 그 함대의 함정 수의 제곱의 비율과 같다고 한다. 즉, 아군과 적군의 함정 비율이 1대 3이라고 하면 실제적인 전력의 비율은 1대 3이 아니라 1대 9, 즉 제곱의 비율이 되는 것이다. 랑베르에게 그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조슈아는 '그래서 상대방보다 적은 수의 함정으로 역전승을 거둔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단정지었던 게 랑베르는 생각났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 경 자신이야말로 그런 법칙을 무시하고 적은 수의 함정으로 대군을 이겨버리는 어이없는 일을 그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벌이지 않았던가…

그 아이러니한 상황을 떠올리며 랑베르는 결국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는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후퇴하라!"
어차피 나폴리 쪽에 있는 교황군이 지원을 와줄 리도 없었다. 랑베르는 향후 무슨 식으로 문책이 오던 간에 일단은 최악의 피해를 막기 위해 휘하 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



후퇴하고 가까스로 남은 군세를 수습한 뒤에 파비아로 다시 돌아가는 랑베르는 나폴리로 돌아가는 중간에 커다란 피해를 입은 사실을 대본영에 알리는 마법 전보를 보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겨우 한숨을 돌린 랑베르 공에게 대본영에서 입전이 왔다.
아까 전 보고에 대한 문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랑베르는 통신을 연결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명 기베르 공이 연결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뜻밖에도 화면에 모습을 비춘 건 부르봉 가의 에르퀼 경이었다.
그는 뭔가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을 담아 랑베르에게 힐책의 한마디를 던졌다.
"어째서 군사를 돌려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그 말에 랑베르는 자신이 중과부적이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미리 우리가 거기로 갈 거라는 사실을 그들도 예측은 했겠지만 그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줄은 몰랐었네. 더 이상 그곳에 있었다면 나폴리 근처까지도 못 가보고 전멸할 뻔 했으니까 말이…"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랑베르 공?"
랑베르가 하는 말을 중간에 끊고 에르퀼이 또다시 힐책하듯 말했다.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끝까지 싸워 임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군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런 비겁한 모습을 보이시다니 '표효하는 사자'답지 않으십니다. 뵙는 제가 다 민망해지는군요."
"비겁하다고?!!"
순간 랑베르가 울컥했다. 지금 감히 누가 누굴보고 이런 말을…
"필요한 전투였다면 그리했겠지. 하지만 별 쓸데 없는 지시 때문에 나와 함대 일원들이 그 곳에서 의미없이 죽기라도 했어야 했단 말인가?"
"필요하다면."
"이봐, 부르봉 백작!!"
랑베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일갈했다.
"이제까지 자네의 그 같잖은 전략전술이나 레이몽드 영감의 되도 않는 헛소리까지 다 참아왔지만 그따위로 자네가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겠네."
"지금 협박을 하고 계신 겁니까?"
"필요하다면."
에르퀼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명하신 명장 아키텐 공께서 설마 '사자왕의 아들' 상파뉴 백작같이 소심한 겁쟁이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자네같은 머저리가 아닌 것이겠지!"
"머저리라구요?!"
그 말에 에르퀼의 입술이 분노에 부르르 떨렸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단어였다.
"당장 그 말 취소하시죠, 아키텐 공! 그리고 다시 나폴리로 떠나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반역으로 취급해 정부에 상신하겠습니다!"
"반역이라고!?"
드디어 랑베르 공이 속으로 꾹꾹 눌러대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반역이라고 했나! 요새는 시덥잖은 얼간이 자식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도 반역이라고 새롭게 정의하기라도 했나!?"
"소관은 기베르 공을 도와 이 전쟁의 전략을 총괄하는 위체에 서 있습니다. 소관의 지시가, 그리고 재상 각하의 명령이 바로 폐하의 어명이나 진배없다는 사실을 경께서도 확실히 아셔야…."
"네놈이 감히 어쩌고 어째!!?"
아키텐의 공작 랑베르 공의 가문의 가훈은 '이 사자의 표효를 들으라 Venez entendre I'hurlement de ce lion'
그 가훈에 걸맞게 사자의 표효를 토하며 랑베르가 일갈했다.
"감히 네놈이 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말을 지껄이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냐!"
"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충심과 우리 가문의 충심은 제국 안의 누구라도 다 아는…."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자네가 정 그렇게 자신의 작전에 자신이 있다면 여기로 자네가 직접 와서 지휘를 하게!"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는 듯이 랑베르는 말했다.
"그렇게 자신있다면 내가 지휘권을 줄테니 자네가 직접 와서 지휘해 보란 말일세! 내가 거기로 가겠단 말일세!"
그 말에 이젠 에르퀼은 당황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키텐 공… 공은 지, 지금 말도 안되는 억, 억지를…."
"왜? 겁이라도 나는 건가? 그렇게 개소리로 전략을 지껄이고 나서 막상 직접 해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겁이라는 게 생긴 모양이지? 그딴 개같은 작전을 지껄일 거면 직접 와서 자네 손으로 지휘하고 여기서 자네가 뒈지란 말일세!"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성토를 하고 나서 랑베르는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어디까지 자신에게 반항을 할 것인지 지켜볼 요령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고 있었던, 에르퀼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 대신에 전혀 뜻밖의 상황이 그의 눈 앞에 벌어졌다.

"…!!!"
에르퀼의 눈이 허옇게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히는 것과 함께 입에서 거품까지 물며 뒤로 쓰러지며 화면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뜻밖의 광경에 순간 랑베르도 뭐라 말을 하지 못한 가운데, 주위에 있던 부관들이 황급히 에르퀼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통신 영상에 비쳐보일 뿐이었다. 아마 발작까지 하는 듯 부관들이 힘겹게 에르퀼을 잡는 모습까지 보였다.
"어떻게 된 건가!?"
한 차례 큰 소동이 벌어진 걸 끝낸 후에야 에르퀼 대신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아키텐 공이십니까? 소관은 기베르 공의 주치의 뱅상 Vincent 자작입니다."
"아, 경이시군. 그런데, 아까 어떻게 된 건가?"
평소 자주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던 그의 등장에 랑베르 공은 인상을 풀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뱅상 경은 그의 그 질문에 차마 말하기 곤란한 듯,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게 저…."
"…?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가?"
그 모습에 더 궁금증이 생긴 듯 채근하는 질문에 뱅상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에르퀼 백작께서 발작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 발작?"
갑자기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급격한 화로 기절한다면 모르되 다른 것도 아니고 발작이라니… 그렇게 의아해 하는 랑베르에게 뱅상이 부가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극심한 심적 압박과 외부의 강요에 의해 신경이 뒤틀려 호흡까지 곤란해지는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치료를 위해 의무실로 보냈지만 워낙 충격이 큰 것 같아서 한동안 진정을 시킬려면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랑베르가 되물었다.
"자기 화를 못 참고 발광을 하고 있다는 소리란 말이오?"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 나 원 참. 대체 부르봉 공작이 손자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건 어이가 없는 차원을 떠난 일이다. 상관의 말에 분통을 터뜨려 하극상을 저지르거나 폭언으로 맞서는 거라면 인간의 인정상 이해라도 하겠지만, 발작이라고?
"대체로 이런 증상은 저희 의사들이 영혼 비대증(靈魂 肥大症 : Spiritomegaly)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통 자신의 욕망과 바램을 주위의 상황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경우 극도의 흥분을 해서 발생하게 되지요. 즉, 이런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원하는 대로 주위에서 해줘야 합니다."
"…… 지금 뭐라고 했소?"
순간 랑베르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 들었거나 뱅상 경이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농담이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 랑베르 공께서 에르퀼 경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서는 그가 짜 놓은 전략과 작전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수행하셔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당연히 에르퀼 경에겐 그 어떤 작전에 대한 비판과 이견도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가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닥치고 완벽하게 일을 수행해야 비로소 에르퀼 경이 만족해하며 발작 증세가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경께서 저에게 농담을 하시는 거요?"
"아 물론, 치료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랑베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바라보며 빈센트는 아주 냉철하게 의학적인 소견을 말하고 있었다.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만,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도 사실 어이가 없다는 듯 쓴 웃음을 짓는 뱅상 경을 바라보며 이젠 질렸다는 듯이 랑베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말했다.
"부르봉 가에서 아주 칼리쿨라 Caligula 황제를 키우셨군.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안 준다고 빽빽 울어대는 신생아 정신 수준의 머저리 녀석이 세운 작전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요? 이걸 유란드라 제국 쪽에서 알면 아주 좋아서 크로노디스 신께 감사의 기도라도 올릴 거요. 이런 호구같은 군대를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오."
진심으로 부르봉 공작을 저주하며 랑베르가 말했다.
"그렇다면 대신 기베르 공을 연결해 주시오. 그에게 일단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으니까 말이오."
안되면 직접 지휘관에게 의견을 상신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지만, 뱅상 경은 뭐가 또 곤란한지 저어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그게…."
"…? 또 뭔가 있소?"
뭐 설마 더 말할 게 남아있기라도 한 건지 궁금해 하는 랑베르에게 뱅상 경은 말했다.
"지금 기베르 공께서는 피에르 경과 카드 게임 중이십니다. 아시다시피 기베르 공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을 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
"…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차라리 환청이라면 좋겠지만 분명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이젠 랑베르는 거친 소리까지 입에 담아 물었다.
"아시다시피 기베르 경께서는 카드 게임 중에는 그 누구의 방해를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아까 전에도 에르퀼 경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신 채 카드 게임을 하시면서 게임 중에는 그 어떤 보고라도 에르퀼 경에게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저 얼간이 같은 폭군 녀석에게 전권을 위임해 두고 기베르 공께서 한다는 짓이 카드 게임이라는 거요? 이거 나 원 참…."
이젠 헛웃음까지 나올 정도였다.
"알았소, 뱅상 경. 나중에 카드 게임이 다 끝나면 본인의 말이나 전해 주시오."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
"아니오, 됬소. 카드 게임이 다 끝나면 랑베르가 이렇게 물어봤다고 전해주시오. 돈은 많이 따셨는지, 그리고 패는 좋게 나왔는지 말이오. 거기다가 한 마디 더 전해 주시오."
랑베르는 어떻게 말을 꾸며도 절대 그 모멸감을 감출 수 없다는 듯 한껏 비아냥을 담아 말했다.

"적군 놈들이 코 바로 밑에까지 온 순간에도 기베르 공께선 그 빌어먹을 놈의 카드 게임을 계속 하고 자빠져 계실 것인지 꼭 물어봐 주시오."





by 요아킴 | 2009/09/18 23:13 | 바람과 대지의 노래 | 트랙백 | 덧글(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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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9/19 02: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9/19 09:03
앗, 조언 감사요 ㅇㅅㅇㅋ
Commented by ダ-スケロロ at 2009/09/19 09:40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어!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9/19 15:44
ㅋㅋㅋㅋ
Commented by jet at 2009/09/19 13:18
휘하 병력이 전쟁 중인데 카드나 치고 있는 최고 사령관이라.... 왜 전쟁에서 지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군요.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9/19 15:44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아서 저러는 것이지만, 랑베르가 열받은 이유는 기베르가 중요한 보고마저 저 에르퀼 같은 얼간이에게 미뤄버린 거 때문이죠. 안그래도 얼굴만 쳐다봐도 혈압이 오르는 녀석인데 그놈보고 보고를 하라고 하니 열이 안받을 수가 없죠(......)
Commented by 미스트 at 2009/09/19 14:22
근데 저거 왠지 은하영웅전설의 전쟁통에도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는 그 에피소드 생각납....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09/19 15:42
맞습니다. 제 글에서는 카드 게임으로 해놨습니다. 똑같이 해놨다간 뭔 소리를 들으려구요 'ㅅ');;;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9/09/20 10:21
윤민혁님 은영전ts에 나오는 앤(...)포크 식으로 발광했다면 굉장히 으스스했겠습니다.^^
Commented by 이름없는괴물 at 2009/09/21 07:44
50보 100보기는 하지만 은영전의 '잠자는 최고사령관'보다도 더한 막장사령관이군요.
그 영감님은 적이 쳐들어오면 깨우라는 말이라도 했었는데 이건 뭐......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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