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04일
Chapter 3 - 파비아 전투 The Battle of Pavia (6)


-9-


오늘 신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지 않았다.

- 알폰소 주제페 디 라이스나 (Alfonso Giuseppe di Raicena)



"공격하라! 공격!"
노르망디 대공의 명령에 함대가 유란드라 제국군의 본진을 향해 함포를 발사했다.
현재까지 팽팽하게 진행이 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행스럽게도 먼저 진형을 잡은 네우스트리아 쪽이 유리한 편에 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파비아 쪽에서의 공격이 있을지 몰랐던 뒤를 안전하게 해 둔 상태에서 적이 오는 것에 맞서서 미리 진형을 잡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 이대로 싸우면 불리하진 않겠어."
노르망디 대공 샤를은 부하들을 독려하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정작 그 말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아군들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주신 크로노디스께서 유란드라 제국군만의 신이 아니라면 부디 우리들도 수호해 주기를… 샤를은 그렇게 간절하게 속으로 빌었다.


"기세 좋은데, 저 친구들?"
레오폴트가 싱긋 웃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레오폴트는 자신의 군대를 마주보며 단단하게 진용을 펼쳐 보인 네우스트리아 군이 마음에 들었다. 이왕이면 몇번 붙어보기도 전에 박살나는 적보다 이렇게 제대로 대항하는 적이 싸움을 하는 재미가 더 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전의 생 캉탱의 꼴사나운 모습보다는 훨씬 정연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렇게 대항하는 적들에 대해 호응이라도 하듯 레오폴트는 그 붉은 핏빛의 눈동자에 호전적인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적어도 사기가 오른 적들에게 넙죽 함대를 앞에 가져다 바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저렇게 맹렬한 적들의 예봉을 받아내고 나서 그 머리를 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법. 레오폴트는 그런 역에 적격인 자를 알고 있었다.
"그럼 일단 이런 쪽에는 도가 튼 독안룡 란돌프 경을 내세워야겠군."
…무모한 적들에겐 무모한 아군이 제격인 법이다.




네우스트리아 군의 공격이 효과적이었는지 그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유란드라 군의 본진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적군의 좌우익도 네우스트리아 군과의 싸움을 진행하면서도 본진의 움직임에 맞춰 느릿느릿하게라도 같이 후진을 하는 것 같았다.
샤를은 아군의 공격에 흠칫 뒤로 물러서는 적들에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반대로 상대가 움츠러든 이때가 호기라고 생각했던지 툴루즈 백작 로웰이 외쳤다.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돌격하라!"
생 캉텡에서 싸우는 그 모습을 보고 조슈아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정도로 로웰 백작은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심지어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도 "어느 쪽을 쏴도 다 적이니까 오히려 더 잘 됐다."라고 말할 정도로 담대한 인물이었다.
로웰 백작은 그렇게 기세 좋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그 말과 함께 툴루즈 백령 함대가 세차게 유란드라 군을 향해 마력포를 퍼부으며 돌격했다.
"…!!? 저게 뭐하는 짓이야!!?"
노르망디 대공 샤를은 서서히 후진하고 있는 적군을 향해 돌격하는 툴루즈 백령 함대를 보고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저렇게 보조를 맞추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제멋대로 저런 행동을… 그리고 샤를은 자신의 염려가 바로 그 순간 적중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 뭐지?!!"
어느 새 후진을 멈춘 유란드라 군의 우익 부분의 함대가 로웰 백작의 함대를 반포위하여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샤를은 유란드라 군의 우익에 있는 테오도르 군의 흑사자 함대(Flotte Schwarz-Löwe)가 로웰 백작의 함대를 오목진에 가둬 포화를 퍼붓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입에서 중얼거리는 말만으로 로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저주를 되뇔 수밖에 없었다.
"노르망디 대공 각하! 혼전이 벌어지는 상황이라서 저희도 포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하다. 게다가 로웰 백작이 얻어맞고 있는 전장은 적의 본진 바로 앞. 그대로 두면 적의 본진에게 산산조각이 날 상황이었다. 하지만 포격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 툴루즈 백작을 구하러 가자!"
샤를 대공은 플랑드르 백령 함대와 페리고르 백령 함대를 전진으로 삼아 구원 군을 보냈지만, 뜻밖에도 이번엔 적의 본진이 직접 전진을 해오기 시작했다.


"란돌프 경! 경의 란트츠크네흐트 함대로 적의 비어있는 측면을 쳐 주시오!"
"맡겨 주십시오, 각하!"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통신 화면 속의 그는 안대를 하지 않은 한쪽 눈에 믿음직한 눈빛을 띠었다.
자신의 함대는 돌격에 있어서, 그리고 그 저돌성에 있어서 제국에서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함대이다. 바로 자신이 경애하는 상관인 게오르그 경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군대… 그 군대를 유리피디아 제일의 강군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손에 달렸다.
그것을 명심하면서 란돌프는 그 누구보다도 맹렬한 속도로 적군의 측면을 칠 것을 휘하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견적필살(見敵必殺)이다! 모두들 거리낌 없이 용맹하게 나아가라!"


노르망디 공 샤를은 적군의 본진이 오히려 플랑드르 군과 페리고르 함대를 반포위해서 두들기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지금 적군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다가오는 아군을 분단시켜 각개 격파를 하는 것이었다. 툴루즈 백작이 무모하게 돌격한 것을 이용해 네우스트리아 군의 포격을 그들의 아군을 방패막이 삼아 멈추게 하고, 아군을 구하러 오는 후속 투입부대까지 반포위로 감싸 시간차로 분단을 시켜 레오폴트가 공격을 한 것이다.
샤를은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된 것에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그 순간 적군의 좌익 부분의 함대 일부가 보이지 않는 걸 눈치 챘다.
"… !?!!"
그렇다면…!?

- 쾅!!!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측면에서 란트츠크네흐트 함대의 공격입니다!"
어느새 비어 버린 이쪽 진형의 측면을 노리고 저돌적으로 적군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거 한 방 먹었군!"
샤를 공은 그 순간 자신의 패착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3등분으로 동강난 함대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된 셈이니 이길 가능성은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
게다가 이곳은 적의 영토…. 시간을 끌수록 결국 아군에게 불리해 질 수밖에 없다.
"모두들 침입해 온 적군들을 막아내도록! 최선을 다하라!"
샤를은 이제 패색이 짙어져 가는 전장을 수습하고 후퇴의 시간을 벌기 위해 란트츠크네흐트 함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랑베르와 조슈아의 함대가 후방에 있는 별동대를 막아내고 제 시간에 이곳에 와 주기를 바라면서.
"제발 랑베르 공이든, 조슈아 공이든… 무사히 여기로 돌아와 주면 좋겠군. 위험해 이 상황은…."
그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그 두 명장이 도와주러 오길 바라며 란트츠크네흐트 함대와 맞서는 노르망디 공작 샤를…

하지만, 그 순간 앙주(Anjou)의 샤를 드 부르봉 백작의 함대가 적군을 향해 몰래 다가가는 것은 샤를 공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결국 그들은 이제까지 딴 돈을 모두 잃은 셈입니다."
도박의 판돈에 비유하는 부관의 보고에 독안룡 란돌프는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만족한 듯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어리석게도 돈을 걸 패를 잘못 고른 벌을 받는 거 아닌가. 그건 자기들 잘못이지. 하하."
건방지게 비유법을 썼는데도 마침 기분이 좋았었는지 딱히 나무라지 않는 란돌프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심 쉰 부관은 전황 보고서를 제출했다.
"현재 네우스트리아 군의 주력 부대는 약 반 정도가 항해 불능 상태일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 유란드라 제국군의 승리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아직 완전한 승리는 아니야."
브릿지의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파비아 상공에는 불길에 휩싸인 채 지상으로 추락하는 네우스트리아 제국군의 비공함들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항모 급의 함정까지 유란드라 제국군의 맹공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다.
레오폴트 공작이 말한 대로 파비아에서 진을 다 빼놓고 있던 적군을 뒤에서 공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군 쪽이 약간은 밀렸지만, 결과적으로 조급한 쪽은 적군 쪽… 심리적으로 조급해질 수밖에 없던 적군의 실책으로 결국 이 싸움은 아군의 승리로 마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승리에 완벽하게 마침표를 찍는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바로 란돌프가 자랑스러워 하는 란트츠크네흐트 함대가 그 선두에 서서 말이다.
이 함대의 기풍을 나타나는 좌우명, 그것은 견적필살(見敵必殺)… 그 좌우명에 부끄럽지 않게 란돌프는 호기롭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먼저 전투의 시작에 나섰으니 끝도 우리가 직접 내는 것이다! 모두들 돌격하라!"
이제 패배의 기운을 느꼈는지 후퇴를 하기 시작하는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함대… 그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치는 란돌프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치 승냥이 떼같이 눈을 반짝이며 란트츠크네흐트 함대의 캇츠발게르(Katzbalger) 비공함들이 맹렬한 기세로 적군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란돌프에게 벌어졌다.
- 쾅!!!
빛이 번쩍이는 것과 함께 란돌프가 타고 있는 기함 「블라스라이터(Blassreiter : 창백한 기수)」의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던 호위 비공함 한 척이 일격에 침몰되었다.
"…?!!!"
생각지도 못한 어딘가의 공격에 바로 옆에 있던 함정이 침몰하자 그 대담한 란돌프마저 순간 움찔했다.
"뭐야, 대체!!?"
"적군의 장거리 포격입니다, 각하!"
오퍼레이터가 그의 물음에 답했다. 오퍼레이터는 다급하게 적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듯 바쁘게 계기판을 조작하고. 곧 그 정체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식별 마법 작동 중… 공격한 함대의 정체는…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상파뉴 백작령 함대입니다!"
"상파뉴 백작이라면… 조슈아, 설마 그 자인가?!"

"호오, 그 '사자왕의 아들'이 등장하신 건가?"
유란드라 군의 우익 쪽에서 후퇴하고 있는 네우스트리아 군을 요격하고 있던 아르투르가 감탄한 듯 말했다.
상파뉴 백작령 함대는 후퇴중인 아군의 후위를 맡겠다는 듯 란돌프의 란트츠크네흐트 함대의 앞을 막아서며 란돌프의 저돌적인 기세를 일순간 짓눌러 버렸다. 듣기로는 저 조슈아라는 장수는 지장(智將) 쪽에 가까운 걸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의 저 모습은 란돌프와도 견줄 정도로 저돌적인 맹장(猛將)의 모습에 가까웠다.
소문으로만 듣던 것과는 다른 의외의 모습을 발견해서인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띄우며 아르투르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란돌프 경을 도와주러 가볼까?"
사실은 그도 조슈아와 싸워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조슈아란 자가 비프로스트를 무혈점령했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부터 아르투르는 대체 그런 미친 짓을 성공시킨 그 작자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기에 그런 짓이 가능했는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이번 같이 제대로 찾아 온 기회를 그가 놓칠 수가 없었다. 물론 란돌프가 아르투르의 도움을 반길 리는 없겠지만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자신이 조슈아와 싸워보고 싶다는 것을 막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아르투르는 생각했다. 심지어 레오폴트 공작조차도 그걸 막을 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아르투르가 휘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는 찰나…
"팔츠 백작 각하, 현재 추적중인 적군 쪽에서 한 함정이 이쪽으로 통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슨 요청인가?"
하필이면 조슈아와 싸워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적군의 통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짜증스러웠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르투르가 통신장교에게 묻자 그는 대답했다.
"항복입니다, 각하. 자기 이름을 앙주 백작 샤를 공이라고 밝히며 항복과 함께 포로를 인도하고 싶다고 합니다."
"포로?"
그 말에 묘하게 아르투르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돌격하라! 기껏 해봤자 한 함대일 뿐이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건 그 누구라도 부숴버려!"
란돌프의 기세 좋은 외침과 함께 란트츠크네흐트 함대는 그야말로 저돌적으로 조슈아 함대에게 원추형의 진형으로 돌격했다.
조슈아의 함대는 그런 란돌프의 함대의 예봉(銳鋒)을 유연하게 피하며 옆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그리고 옆으로 미끄러진 것과 함께 란돌프 함대의 측면에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옆에서 공격을 받자 란돌프 함대가 잠시 멈칫한 사이, 조슈아의 함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모여선 란돌프 함대의 측면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여 그들의 원추 진형을 두 동강 내 버렸다.
"…뭐지?!"
그리고 양분된 란돌프 함대의 한 쪽을 향해 돌진한 조슈아 함대의 일부가 방향을 뒤틀어 돌격하며 아직 건너오지 않은 아군과 함께 란돌프 함대의 한 쪽을 포위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른바, 아군의 일부를 '모루'로 삼아 적을 그 사이에 두고 '망치'로 두들기는 진형이었던 것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특기였던 전술을 저렇게 유연하게….”
레오폴트는 조슈아가 지금 자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것조차 순간 잊은 듯 감탄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공격당하고 있는 란돌프를 돕기 위해 조슈아의 함대를 마르틴 백작의 함대가 옆에서 공격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조슈아의 함대는 그 기세를 너끈하게 받아내고는 이제까지 두들기고 있던 란돌프의 함대를 버려두고,
"…!!?"
놀랍게도 옆으로 마르틴 군의 예봉을 비켜 세우고는 바로 함대 전체를 세찬 속도로 전진시켰다.
하늘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듯 궤도를 따라 돌격하는 조슈아의 함대가 향하는 곳은 바로…

…레오폴드 공작의 기함이 있는 본진이었다!

그 순간 본진 우익 측에서 레오폴트 공작을 보조하고 있던 테오도르는 얼굴에서 핏기가 없어지는 걸 느낄 정도였다.
"뭐지! 저런 미친 짓을?!"
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방의 수장을 향해 달려드는 조슈아 함대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물론이고 레오폴트마저도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러나 곧 레오폴트는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이런 자가 이제까지 자신의 승리를 가로막고 대항한 자… 이렇게 담대하고 또한 지혜로운 명장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호적수를 찾아서 기쁜 듯, 레오폴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환하게 미소가 지어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긴장감과 흥분이 섞인 감정을 갈무리하듯 더욱 더 냉철한 표정으로 하늘에서 자신의 본진을 향해 내려오는 조슈아 함대의 모습을 노려보며, 레오폴트는 믿음을 담은 목소리로 테오도르에게 명령을 내렷다.
"테오도르 공! 저 사자의 이빨을 부러뜨려 주시오!"
그 믿음에 보답하듯 세차게 전진한 테오도르 공의 함대가 조슈아 함대의 앞을 막아섰다.
하늘에서 마치 궁그닐(神槍) 같은 기세로 내려오는 조슈아 함대를 받아내는 듯 테오도로의 함대가 진형을 펼치자 조슈아의 함대는 그 순간 뜻밖에도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당황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슈아의 함대는 애초에 본진에 목적이 없었다는 듯 선수를 돌려 선회를 하면서 테오도르의 함대를 피해 버렸다.
그리고 조슈아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란돌프의 함대와 마르틴의 함대가 뒤섞인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 상황에서 뒤를 향해 오목 파인 진형으로 함대를 변경했다.
"… 이건!!?"
그 진형의 변형에 마르틴 경이 먼저 이상하게 생각하고 멈칫하며 자신의 함대를 제지했다.
하지만 란돌프 쪽은 그렇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처절하게 밟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란돌프는 마르틴 경과의 연계 따윈 신경도 안 쓴 채 최대 속도로 조슈아의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르틴의 함대와 란돌프의 함대는 서로간의 조율도 없이 혼란스런 채로 조슈아의 오목진에 선두 부분을 무모하게 들이밀었다.
물론 결과는 뻔했다. 오목진을 통해 조슈아 함대가 퍼부은 집중 포격으로 인해 두 함대가 뒤섞인 선두 부분은 처절할 정도로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방금 전의 조슈아와의 다툼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란돌프의 함대는 이번에 빤하게 당한 함정 때문에 거의 재기불능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거기에 마르틴 경의 함대까지 말려들어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테오도르 공이 바로 그 두 함대 때문에 진로가 막혀, 조슈아의 함대를 공격하기는커녕 그 피해에 말려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추격을 멈춰야 했을 정도였다.
더 이상 두면 아마 자멸할 정도로 앞의 두 함대는 허둥대기만 했었다.
조슈아의 함대는 후진을 하면서도 포화로 신나게 이런 두 함대를 두들기면서 승리의 전공을 챙기고 있었다.


"…이제 슬슬 물러서야 할 거 같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적군을 신나게 박살내느라 환호성을 지르는 부하들에게 조슈아가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네? 지금 한참 이기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 바르토르를 바라보며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이쯤 됐으니 아군 본진도 이제 안전할 겁니다. 랑베르 공께서도 곧 우리들에게 귀환을 명하실 테니 슬슬 물러납시다."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입으로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그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 이 정도면 탄약과 연료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더 이상 적군을 막아서며 싸우다가는 맨몸으로 그들의 손에 맞아 죽는 일밖에 없을 터….
"볼 일도 끝났으니 이젠 집으로 가야죠. 뭐, 이번에는 그런대로 싸울 만하긴 하군요."
…무려 적의 3개 함대와 연속으로 정면 대결을 해서 그 중에 2개 함대를 괴멸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넣은 후에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그 느낌이 마치 집 앞 공원에 산보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긴장감 제로이긴 했지만 말이다.

바르토르는 그렇게 태평하게 '나름대로 싸울만한 전투였네요.'라고 감상을 표한 자신의 상관을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 과연 인간이란 종족에 속하는 생물이긴 한 건지 그게 궁금하다는 듯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10-



파비아 전투.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2000척 중 잔존 병력은 1100척. 반면에 유란드라 제국군 2300척 가운데 남아있는 병력은 2000척.
이번 전투는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신성 유란드라 제국군의 승리였다.
네우스트리아 제국의 대군은 이번 전투를 통해 거의 반수에 가까운 함정을 잃어버린 통한의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몇몇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귀족들마저 기함이 당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파비아의 상공은 그런 전쟁의 상처만을 남기고 서로 물러난 함대들 사이에서 저녁노을을 남기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마치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의 피로 도화지에 색을 칠하듯이.

"이것이 바로 무모한 전쟁의 말로군요."
란돌프가 지휘하는 함대에서 레오폴트가 타고 있는 기함 「슬레이프니르(Sleipnir)」에 승선했던 프룬츠베르그 경이 레오폴트의 옆에 서서 조용히 감상을 표하듯 말했다.
프룬츠베르그 경의 옆을 보좌하며 기록을 담당하는 종군 서기관인 라이스나 경도 파비아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하듯 말했다. 마치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성이 불타는 모습을 노래했던 호메로스라도 된 것같이.
"…오늘 신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았다."
그 말을 들었는지 레오폴트가 라이스나 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니라네, 라이스나 경. 신께선 그렇게 매정하지 않으셨어. 저들 중에는 신에게 자비를 받은 것도 모자라서 축복까지 받은 자가 있질 않은가?"
명백히 조슈아를 지칭하는 그 말에 무안함을 감출 수 없었는지 라이스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레오폴트도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약간 분했는지 이를 악다물었다. 분명 이번에 승리를 거둔 건 확실했다. 그렇지만 또 이번에도 마지막에 승리의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기 전에 그 술잔을 저 조슈아란 작자가 건방지게 쳐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부하들의 3개 함대가 농락당했다. 심지어 그 중에서 2개 함대는 고작 하나의 함대에게 괴멸에 가깝게 피해를 입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망신 중에 망신이란 말인가.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하는 그 사기꾼 작자가 지휘를 한다고 해도 그렇지, 고작 한 개 함대가 도망을 치면서 여유 있게 뒤를 쫓는 2개 함대를 농락한 것도 모자라서 본진까지 기습을 하려고 - 물론 그건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일종의 페이크였지만 - 했었단 사실은 레오폴트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심정이었기에, 지금 자신의 앞에서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고 있는 두 패장(敗將)을 쳐다보며 레오폴트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래, 란돌프 경! 대체 뭐가 모자랐기에 저 사기꾼 녀석의 함대에게 그렇게 죽도로 얻어맞고 온 것이오?"
레오폴트가 윽박지르는 소리에 독안룡 란돌프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전투의 처음부터 활약을 펼쳐왔던 그가 너무 자만을 했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기에 란돌프도 변명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의 상관인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그 공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패장에게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마르틴 경!"
"네, 각하."
란돌프 옆에 서 있는 마르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이번엔 그를 향해 레오폴트가 말했다.
"그대도 동료를 구하러 뛰어든 것은 좋았으나 오히려 거기서 추태를 확대시키는 것에 일조했소!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아오!"
"…소관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처분을 받들 뿐입니다."
마르틴도 자신이 지적을 받자 자신의 패착을 솔직히 시인하며 레오폴트의 처분을 기다렸다.
"일단은 그대들의 지휘권을 본관이 대행하도록 할 것이며, 본국에서 패배에 대한 처벌을 정하기 전까지는 각자의 기함에서 근신하는 조치를 내릴 것이오."
"……."
"이상 다른 건 없소. 다들 물러나도록."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뉘른베르크 백작 테오도르는,
"저, 각ㅎ…."
레오폴트의 처분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
그러나 옆에서 지긋이 소매를 잡고 그를 멈춰 세우는 이는 바로 팔츠 궁중백 아르투르… 그는 고개를 저으며 테오도르를 만류했다. 지금의 레오폴트 경은 분노가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냉철하게 충고를 해 봤자 먹혀 들어갈 리가 없을 터이다. 그가 화가 풀리고 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진배없는 무모한 짓을 지금 일부러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아르투르의 생각이었다.
"나 원 참…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레오폴트는 분을 이길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완벽한 승리의 마지막 한 발자국 앞에서 자신의 화려한 그림에 군화자국을 내는 걸로 모자라 그림을 찢어버리는 짓을 하는 것인가.

'그 친구는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승리의 기쁨을 빼앗아 간 그 망할 사기꾼 녀석은….'


-*-



레오폴트에게 위안이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조슈아 측도 그렇게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완벽한 패배인 것 같습니다, 각하. 보시면 아시겠지만 향후 10년 안에는 이만한 대규모의 함대를 다시 재건하긴 글렀다고 봅니다."
바르토르의 보고에 조슈아는 나직이 한숨만을 쉴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아군이 이번 전투에서 덧없이 마력포와 비공함의 공격에 찢겨 하늘에서 먼지가 되어 버렸던가.
눈앞에 놓인 네우스트리아 함대 전체의 손해평가 보고서(Damage Report)를 훑어보는 조슈아는 아군의 거의 반 정도가 격파되어버린 결과에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부르고뉴 대공과 노르망디 대공의 군대 정도만 온전한 축에 속한 셈이고, 거의 대부분의 잔존군은…."
그 뒤에 조슈아도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막연하게 짐작을 하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닥쳐보니 이건 충격을 넘어서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기가 아무리 예측의 최악 지점을 집는 데 도가 텄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것까지 집고 싶지는 않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우리 함대는 피해가 없습니다, 각하."
하지만 황당한 사실은 정작 조슈아의 함대는 피해가 거의 없이 온전하다는 사실이었다. 후방을 기습한 양동 함대를 꺾으러 주전장에서 이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지막에 아군을 추적하는 '사기가 한껏 오른' 적군의 3개 함대와 정면으로 붙어 그 중 두 함대를 괴멸에 가깝게 몰아넣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사실상 조슈아의 함대는 안전한 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거의 항상 전투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겁쟁이라고 비난을 들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슈아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자신의 함대엔 억울하게 죽은 전사자가 없게 하겠다는 - 실제로 전쟁을 아는 사람이 이 말을 곱씹어 들어 보면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 약속을 '진짜로' 지킨 것이었다. 게다가 뒤를 추격하려던 적군까지 막아서 아군에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후위를 완벽하게 수비해 네우스트리아 제국군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지 않았는가.
브릿지에 있는 함대 승무원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그 격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듯 어리둥절해 하다가 파비아에서 적군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슈아 쪽을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경외하는 그들의 그 시선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연출한 자신들의 지휘관 조슈아 백작을 향하고 있었다.

이 '마술사'는 이번 전투에서도 그 기적을 보여주었다.
비록 전체 전투에서는 아군이 패배하였지만, 조슈아 공의 함대는 '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적으로 적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분과 함께라면 어떠한 악몽 같은 전투를 치르더라도 패하진 않을 것이다. 어떠한 지옥 같은 전투를 치르더라도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믿음과 경의가 담긴 눈빛으로 부하들이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 캉탱과 비프로스트에 이어서 이젠 파비아에서까지 '불패의 조슈아(Joshua l'invaincu)'의 이름에 걸맞는 업적을 이룬 이 검은 머리의 젊은 지휘관은 부하들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든 말든 상관이 없는지, 피곤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바르토르를 쳐다보았다. 그가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공께선 정말 약속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키시는 분이시군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가 말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진짜로 지키는 사람은 각하 외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죠. 최선을 다한 결과치고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요."
그렇게 대답하며 조슈아는 긴장이 탁 풀렸는지 걸터앉은 지휘석에 벌러덩 뒤로 누웠다. 전과는 달리 이젠 바르토르도 그 모습을 보고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런 조슈아의 모습이 부하들에게 '싸움이 완벽히 끝났으니 안심하라'라는 식으로 안도감을 주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물론 조슈아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조슈아가 그렇게 드러누워 편하게 휴식을 취할 겨를은 없었다.
"각하! 아까 지시하신 것에 대한 결과입니다만,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 태자 전하께선 어찌 되셨나?"
조슈아의 되물음에 부관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태자 전하께서 같이 승선하고 있던 앙주 백작 샤를 경이 유란드라 군에게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포로가 되셨습니다."

…조슈아는 이제까지 그 어떤 전투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기 않고 의연하게 지휘를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담대함은 심지어 랑베르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정도였지만….
"……!"
하지만 지금 그 순간만큼은… 조슈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창백해진 채,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



"아르투르 경, 그러니까 지금 이 '카를' 경이라는 작자가 말하는 게… 쉽게 말해서 자신의 주군을 팔아먹으러 왔다는 거요?"
어떻게 해도 모멸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하며 레오폴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방돔과 앙주의 백작 샤를을 노려보았다.
"글쎄요."
유감이라는 듯 쓴 웃음을 지으며 아르투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앙주 백작 샤를 드 부르봉은 포로의 신분임에도 자존심이 상했던지 따지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주군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레오폴트 공."
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의 주군은 오로지 현 황제의 위에 올라 있으신 앙리 폐하뿐입니다. 여기 있는 이 애송이는…."
그리고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결박되어 있는 프랑수아 황태자를 쓱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는 다만 '죄인의 아들'일 뿐입니다."
"죄인의 아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레오폴트가 되물었다.
"요새 네우스트리아에선 다음 황위 계승자를 그렇게 부르는 게 유행인가 보오?"
반은 비아냥거리는 말로 샤를에게 무안을 준 레오폴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완벽한 승리를 마지막에 가서 망치게 된 것으로도 충분히 화가 치미는 상황인데… 그래도 나름 승리의 기쁨을 누려볼 시간마저 자기 나라의 태자를 팔아치우려고 스스로 항복을 해버린 저 비겁한 배신자 샤를 같은 작자의 개똥같은 변명 따윌 들으며 낭비해야 하다니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를 연금시켜."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레오폴트는 샤를 백작을 가리키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샤를은 귀중한 포로를 가져다 바친 자기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레오폴트의 태도에 불쾌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지만, 레오폴트는 그를 단순한 포로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의 포로이신 네우스트리아 제국의 태자 전하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그리고 레오폴트는 부하를 시켜 프랑수아 태자를 묶은 밧줄을 풀게 한 후 그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전하의 춘추가 18살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그렇소."
프랑수아는 그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일어서선 당당하게 레오폴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태도에 주위의 군사들이 나서서 프랑수아의 허리를 숙이게 만들려고 했지만, 레오폴트는 손을 들어 그런 그들을 제지하고는 말했다.
"소관이 처음 임관했던 나이도 18살이었습니다."
“…….”
“그때도 저는 어떤 선제후들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는 일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제가 할 말을 했었죠.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이는 행동이고 또한 언젠가는 ‘만인의 위에 설 자’가 당연히 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죠. 태자 전하께서도 ‘만인의 위에 설 자’이시니 이 말씀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프랑수아는 레오폴트의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 그의 말에 깔려 있는 언외언(言外言)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조슈아 형님이 예상한 대로 합스부르크 백작 레오폴트는 저 신성 유란드라 제국의 황위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조슈아 형님의 말씀대로 레오폴트 공은 보통 분이 아니군요.”
"형님이라…."
그 지칭에 특별한 울림이 느껴졌는지 레오폴트가 자기도 모르게 되뇌였다.
"그 자는 확실히 대단한 장군입니다. 오늘 우리 측의 승리의 마지막에서도 그가 최후까지 용전(勇戰)을 거듭해가며 저에게까지 그 창끝을 겨누었었죠. 그리고 전하의 군사들이 무사히 퇴각하게 그 뒤를 끝까지 지켰고요."
레오폴트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답지 않게 솔직하게 조슈아에 대해서 높게 평가를 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적국의 태자 앞에서.
"아주 훌륭한 자였습니다. 그런 자를 휘하에 부리고 계시다니 참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오폴트는 비록 포로의 입장에 있다 해도 여전히 일국의 태자다운 위엄으로 서 있는 프랑수아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분은 제가 부리고 있는 신하가 아닙니다, 레오폴트 공. 그 분이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저의 형으로서 말이죠."
"호오…."
일국의 태자가 하는 말치고는, 그 말 속에 조슈아를 정말로 신하가 아닌 경애하는 형으로 모시고 따르는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일체 조슈아를 자신의 밑으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존경하고 따르려고 하는 동생 같은 프랑수아의 모습에 레오폴트는 조슈아가 단순히 머리가 천재인 지장(智將)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는 프랑수아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조슈아라는 자가 태자에게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에 조슈아에 대한 호기심이 약간 늘어나기도 한 것이었다.

조슈아는 제국의 황태손인 ‘프랑수아 태자’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또한 자신의 동생인 ‘프랑수아’를 형으로서 지켜주려고 애쓰고 있다.
프랑수아는 제국의 영웅이자 사자왕의 아들인 ‘조슈아 백작’를 신하로 두면서, 또한 자신의 형님인 ‘조슈아’를 동생으로서 따르고 존경하고 있다.

이상적인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내심 그 관계에 감탄과 부러움을 품은 채 레오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슈아 공과 태자 전하가 그렇게 굳건한 유대 관계라는 것에 감탄을 표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형님'의 '짐'이 될 상황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공의 인질로서 본인이 우리 제국에게서, 조슈아 형님에게서 뭔가를 뜯어낼 미끼가 되어 주길 그쪽이 원하신다면, 차라리 본인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여 주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전 이제까지 항상 제 손으로 직접 승리를 얻어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길이자 저의 신념이자 저의 자존심이죠. 저는 제 자존심을 굽히는 짓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에 프랑수아 태자도 그 말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은 자신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도 하나의 신념을 위해 그 짧은 인생을 살아왔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만일 그걸 꺾는다면 그가 황제가 될 이유도, 그가 조슈아의 보좌를 받으며 수많은 전쟁과 정쟁을 뚫어야 할 이유가 없다.
레오폴트 공에게나, 프랑수아 태자에게나 그들만의 '삶의 목표', 그 '최후의 자존심'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이유'이니까.

레오폴트는 테오도르에게 프랑수아 태자를 정중히 모시고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차후에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의 권한으로 프랑수아를 지내기 편한 곳에서 연금을 시킬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이번 파비아 전투의 승리자인 경애하는 상관의 그 명령을 받들어 테오도르는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이제 레오폴트도 브릿지를 떠나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기함의 복도를 따라 부관 유스티나가 아까 전부터 무슨 할 말이 있었는지 계속 따라왔다.
"…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유스티나?"
걸음을 멈추며 레오폴트가 뒤를 보며 묻자,
"재고하실 여지가 있나 물어보려 합니다."
"뭘 재고한단 말이지?"
"란돌프 경과 마르틴 경에 대한 처분이 약간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과했다고?"
그 말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는지 레오폴트가 뒤돌아서서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내가 과했단 말인가? 난 분명 실책을 범한 부하에게 그들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물었단 말이야!"
"과연 그거뿐이었습니까, 각하?"
"그게 아니면 뭐가 더 있어야 한다는 건가?"
"무언가가 더 있다고 보였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녀는 단지 교황청에서 여기로 달랑 파견만 된 여기사가 아니었다.
교황청에서 체사레 보르지아 추기경의 밀명(密命)을 받고 레오폴트를 보좌하러 왔기에, 그녀는 레오폴트가 체사레 ‘주인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만한 여지를 없애야 할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로 레오폴트가 지금 저지르는 실책도 바로잡는 것이 그녀의 임무인 것이다.
유스티나는 다시 그를 향해 설득을 시작했다.
"레오폴트 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란돌프 경과 마르틴 경이 함대의 지휘권까지 박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습니까? "
"……."
"분명 이번 싸움에서 우리 군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승리에 있어서 적의 본진을 옆에서 급습해 타격을 입힌 란돌프 경의 공이 컸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런 란돌프 경을 도와 본진의 공격에 큰 공적을 세운 것도 또한 마르틴 경의 공입니다.
사실 그런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만일 싸움의 마지막에서 함대가 적군에게 유린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런 처벌을 내리신 거라면 테오도르 경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의 책임을 물어야 할진대, 정작 레오폴트 님은 테오도르 경에겐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레오폴트 님은 그 부분에서 형평성을 잃은 처분을 내리신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약간 무례하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레오폴트 님은 그렇게 남을 차별하시는 분은 아니시죠. 단지… 레오폴트 님은 지금 자신에게 낼 화의 분풀이를 그 두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것일 뿐이니까요."
"내가 나에게 화낸다고?!"
"네, 레오폴트 님. 지금 승리의 마지막을 저 조슈아라는 자가 망친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내시고 계시는 겁니다."
"……."
유스티나는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을 여전히 화난 눈으로 노려보는 레오폴트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될 만큼 지났는지, 레오폴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 그래, 맞아. 유스티나 경, 그 말대로다."
"레오폴트 님…."
"그래, 그 조슈아라는 작자는 항상 이럴 때만 나를 방해해 왔다. 그게 너무나도 화가 났지. 그래, 그래서 란돌프와 마르틴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거야…."
레오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그 조치는 없었던 걸로 하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레오폴트 님."
유스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폴트는 역시 체사레 추기경이 보았던 대로 훌륭한 장군이자 권력을 잡을 만한 영웅이 될 인물이 분명했다.
예로부터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된 상관과 부하와의 불화가 후에 어떤 식으로든 크게 확대되어 향후 커다란 일에서 실책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오늘도 하마터면 그런 빌미가 일어나게 될 뻔했었지만 그걸 대수롭게 넘기는 대신 레오폴트가 아주 너그럽게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위험의 여지를 없애게 된 것이다.
"그래, 그럼 유스티나 양이 란돌프 경과 마르틴 경에게 말을 전해 줘."
"아니오, 그건 안 됩니다."
"……? 아…."
하지만 유스티나는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레오폴트는 그런 그의 반응에 의아해 했지만, 곧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그녀가 레오폴트를 '대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을 용서한다는 명령을 그녀가 대신 전달을 할 경우는 무의식중에라도 란돌프나 마르틴 경이 이 사면을 '유스티나의 힘을 통해 용서를 받은 것'으로 각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혹여나 모를 레오폴트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될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이 아름다운 여기사가 대신 구명을 요청해야지만 겨우 용서를 받을 만큼 레오폴트에겐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위험 때문이라도 그녀는 꼭 레오폴트 자신이 그들 두 명에게 위로와 사면의 명을 직접 내리는 것을 무언으로나마 건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네. 내가 직접 말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레오폴트 님."
고개를 꾸벅 숙이며 유스티나는 레오폴트의 결정에 감사의 말을 올렸다.
다행히 체사레가 예상하고 있었던 레오폴트의 향후 진로에 별다른 돌발 요소가 생길 위험이 제거되었다는 것에 유스티나는 자신이 보좌하고 있는 이 붉은 눈의 합스부르크 백작이 이렇게 이성적이고 너그러운 사람인 것을 감사해 했다.

그리고 이젠 유스티나의 보고마저 끝나서 더 이상 다른 보고를 들을 일이 없다고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각하!!!"
저기 복도 끝에서 뛰어오는 한 부관의 목소리에 레오폴트는 무의식중에 저절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고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으로 패왕이 될 자질을 갖춘 자라면 '난 그런 보고를 들을 기분이 아니다'라는 말로 부하의 말이나 소식을 듣기 거부하는 아둔한 짓은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인가? 보고해 보게."
"본국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각하! 큰일입니다!"
"……?"
그 부관은 이제까지의 싸움에서 단련되어 어지간한 소식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황제 폐하께서… 붕어 崩御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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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아킴 | 2009/10/04 22:08 | 바람과 대지의 노래 | 트랙백 | 덧글(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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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ダ-スケロロ at 2009/10/05 10:01
황제폐하께서 붕어*1하셨습니다!

*1 붕어 -[명]《어》 잉엇과의 민물고기. 개울, 못에 사는데, 길이 10~15cm, 폭이 넓고 머리는 뾰족하며, 주둥이는 둥글고 수염이 없음. 등은 푸른 갈색, 배는 누르스름한 은백색이나 서식하는 수계(水系)에 따라 몸빛이 다소 다름.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10/05 10:12
순간 님 존나 패버릴까 생각햇음(...)
Commented by jet at 2009/10/05 17:24
커그에서 보고 여기와서 또 보는 1人입니다. 다시봐도 꼴불견인 부르봉가....
요아킴님 혹시 부르봉 왕가안티?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10/05 20:00
아, 뭐 막상 생각을 해보니 저런 급의 권력을 가질 정도가 되는 집안이라면 역시 부르봉 집안이 딱인 거 같아서요 -_-;;;;
Commented by 환상진혼 at 2009/10/11 16:27
음 사지방 닫힌동안 진도가 많이 나갔군요
Commented by 얀웬리 at 2009/12/22 13:20
이야기의 큰 흐름이 은하영웅전설 판박이네요,. 아스테이트회전, 이젤론 공방전에이어 암릿처회전이라니....캐릭터도 너무 똑같아요. 이제 양측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트리스탄은 키르히아이스 처럼 죽게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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