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5일
Chapter 4 - 승천에 이르는 길 La route à l'ascensio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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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을 이룬 군주들은 대개 그들이 지킬 것이라고 말했던 약속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개선을 한 레오폴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유란드라 제국 황제 빌헬름 4세의 서거 소식이었다.

제국 안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파비아의 승전을 보고할 겨를도 없이 황궁 안의 속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예의 주시해야만 했다.
역사적으로 신성 유란드라 제국의 황제는 선거를 통해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백여 년 전 황제 카를 4세가 여러 제후들과 모여서 제정한 금인 칙서 Goldene Bulle 의 조항에 따라 지금까지도 7명의 선제후가 각각 선거권을 가지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황제를 뽑아왔던 것이었다. 만일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황제가 되면 그 선제후는 어떤 의미로든간에 그 황제에게서 여러 가지 이권과 특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이유로 각 선제후와 그 추종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제위가 부재중인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상황을 일으킨 당사자인 빌헬름 4세는 생전에서 선정을 베푼 적도 없으며 하다 못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천명해 전쟁을 일으킨 적도 없으니, 불행하게도 정작 그의 죽음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지도, 저주를 퍼붓지도 않고 무관심과 망각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건 레오폴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제위만 유지하고 있었을 뿐인 그딴 늙은이가 죽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도 지금 공석이 되어 버린 제위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것이 될 자리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전에 라인 궁중백 팔츠 백작도 레오폴트를 회유한 적이 있긴 했지만, 레오폴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선제후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날을 보내고 있던 레오폴트는 어느 날 자신이 아는 한 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황도 빈도보나에서 만나게 되 가끔 아르카디아의 자연 과학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던 학자인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 Agripha von Nettesheim 은 오랫만에 재회하게 된 레오폴트에게 한 남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그리파 경께서 추천을 하신다니 상당히 대단한 사람인 듯하군요."
"에노트리아에서 온 정치학자입니다. 거기서 꽤 파격적인 정치론을 주창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람이지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神國論 : De civitate Dei)을 상당히 강도 높게 비판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 그래요? 호오…."
아그리파가 언급한 신국론이라는 책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서 크로노디스 신의 하늘의 왕국을 지상에 실현하는 것이 모든 위정자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정자의 정책이나 정치에는 '크로노디스 신과 성 아서 대왕의 뜻에 따라' 교회가 확립하고 공표한 일종의 도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는 말이었고, 이는 후에 교회에서 종교가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 걸 알고 있었던 레오폴트는 평소에도,

'저게 무슨 말도 안되는 탁상공론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인간의 왕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도에서 계집질에 축재 蓄財 에 영토 전쟁이나 일으키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다스리는 교회는 저 신국론에 나오는 말을 제대로 따르기는 하는 건가. 애초에 교회 자체에서부터 실천을 하지 않고 있는 걸 평신도들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면서 그 '성인의 말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 레오폴트에게 아그리파의 그런 소개 내용은 그 정치학자에 대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혹시 자신이 원하는 정치 이론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며 레오폴트가 물었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을 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네, 레오폴트 공작. 흠, 이름이 뭐더라…."
그도 순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는지 약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는 듯이 밝게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생각났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라는 사람입니다."




"현재 이 제국의 선제후 Kurfürst 이신 분들은 총 일곱 분입니다."
상당히 깐깐한 인상을 가진 이 남자는 레오폴트와 트리스탄이 배석한 자리에서 정중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눈매가 매서운데다 얼굴선마저 날카로와 처음 본 인상에서부터 사람에게 이유없는 적대감을 은연중에 가지게 만드는 이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후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그 인상을 부드럽게 중화시켰다. 아마 이 인상을 가지고 어떤 냉정한 말이 나오더라도 듣는 사람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게 만들어 두고 나서야, 그 목소리 톤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그만의 유세 遊說 방법일 것이리라.
"마인츠 Mainz 의 대주교 베네딕투스 Benedictus 예하를 위시하여, 콜로니아 아그리파나 Colonia Agriphana (쾰른 Cologne)의 대주교 세바스티안 Sebastian 예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Augusta Treberorum (트리어 Trier)의 대주교 마르크 Mark 예하, 라인 궁중백 Rhein Pfalzgraf 이신 빈센트 Vincent 각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Brandenburg Markgraf 이신 알베르트 Albert 공, 베멘(보헤미아 Bohemia)의 왕이신 알브레히트 3세 Albrecht III 전하, 그리고 작센 대공 Sachen Erherzog 오토 Otto 공… 이렇게 일곱 분이 선제후의 이름으로 금인 칙서에 의거해 이제까지 신성 유란드라 제국의 황제를 선거로 선출해 왔습니다."
오토의 이름에 레오폴트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미세하게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건 일종의 조건 반사와도 같은 것이라 레오폴트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실. 그러나 그걸 놓치지 않고 본 이 연설가는 말을 이어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세 대주교 예하들께서는 실제적으로 유란드의 교황 성하의 가신들입니다. 절대 레오폴트 각하의 편이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사람의 머리를 굳게 만드니까 말이죠."
언뜻 들으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을 하면서도 이 남자는 전혀 움츠러든 기색이 없었다. 그런 그가 대담해 보였는지 레오폴트도 흥미있다는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공과 보헤미아 국왕 전하께서는 수테텐 지방을 두고 알력을 벌이고 계십니다. 아마 이 힘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두 분은 작센 공작 오토 대공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 그 두 분 중에서 선택받지 못한 쪽이 레오폴트 님에게 군사를 빌리기 위해 손을 내밀 것이라고 예측됩니다만… 소관의 견해로 볼 때, 레오폴트 공께선 그때까지 그렇게 멀뚱하게 기다리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공께서는 공 나름대로의 전략과 정략을 수립하시면서 그런 기회가 올 때 마지 못해 받아주는 척만 해주셔도 좋습니다. 그들에게 일종의 빚을 지워주자는 것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는 동작을 하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분명 팔라틴 백작과 레오폴트 공작님께선 불리한 입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두 분에겐 커다란 봉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이 가진 막대한 재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두 분 소유의 강력한 사병 私兵 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을 멈추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 웃는 것같이 냉기가 서린 얼굴에 그런 웃음을 띠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팔라틴 백작에겐 황실의 법정 권한과 재무 권한을 관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레오폴트 공작님에겐 제국 원수 Reich Großadmiral 로서 제국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공의 머리 속에 내재된 천재적인 전략, 전술이 있습니다. 만일 이 두 세력이 서로 손을 잡는다면…."
"무력을 얻은 권력, 권력을 얻은 무력만큼 무소불위한 것도 없긴 하지, 마키아벨리 경."
그 말에 이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결론을 말했다.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필요할 시에 공께서는 공께서 '직접' 제위에 올린 '황제의 이름으로' 선제후들을 토벌하실 수 있는 겁니다. '반역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말이죠."
그 선제후들을 '반역의 이름으로 토벌할 수 있다'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올릴 수 있는 배포에 감탄하며 레오폴트가 작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거 마음에 드는 소리로군."
"더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각하."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보면 사악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팔라틴 백작과 손을 잡으시면 가장 좋은 점이, 필요할 시에 그런 자는 얼마든지 쓰고 버리기 편한 말이라는 겁니다. 공의 무력이 없이는 실제적으로 무력 따윈 없는 자이니까 말이지요."
그 말에 레오폴트는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듯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호오… 그것이 자네의 정치 철학인건가, 마키아벨리 경?"
"정치라고 하셨습니까, 각하?"
그 질문이 의외라는 듯이 놀란 표정의 마키아벨리는 레오폴트의 그 말을 부정하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각하, 이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이건 게임입니다.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베팅하는 게임이지요. "
" … 게임이라."
"죽음을 저당잡아서 하는 체스나 마찬가지입니다. 각하, 이것만큼은 절대 잊지 마십시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대방의 '킹'을 잡아야지만 각하께서는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있으십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말입니다."
"… 흠."
마키아벨리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는 듯, 잠시 침묵한 레오폴트는 얼마 안 있어 입을 떼었다.
"이왕이면 편법 없이 킹을 잡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자네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네."
"감사합니다."
마키아벨리가 황송해 하며 몸을 숙였다.
"결국 지고의 자리로 올라가는 길은 피투성이입니다, 각하. 공작 각하께서는 항상 그걸 잊지 않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각오는 되어 있지만, …자네도 그런 각오는 되어 있나?"
그 말에 마키아벨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말이 그를 채용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건 그도 당연히 파악했다.
"물론입니다. 각하. 부디 그 각오가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결국 각하의 싸움의 결말은 '카이사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Aut Caesar, Aut Nihil.'"
"카이사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레오폴트가 되물었다.
"좋은 말이군. 자네 집안의 가훈인가?"
"아닙니다. 제가 전에 모셨던 분이 평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셨죠."
"누구를 모시고 있었나?"
그 말에 마키아벨리가 대답했다.
"현 알렉산데르 교황 성하의 '조카'이신 발렌시아 추기경, 체사레 보르지아 공이십니다."


-*-



"파비아에서의 네우스트리아 제국군의 패배… 그리고 신성 유란드라 제국 황제의 서거라…."
체사레가 곱씹어보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프란체스코 공이 질문을 던졌다.
"향후 어떤 상황이 되리라고 보십니까?"
"일단은 신성 유란드라 제국 쪽을 주시해야 할 겁니다."
체사레가 말했다.
"선대 황제가 후계자도 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대공위 시대같이 황제가 없는 식으로 선제후들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겁니다. 이곳 유란드 쪽에서 야심이 워낙 만만치 않을 테니까 말이죠."
"하긴, 재수없게 교황 성하 쪽에 매수된 황제가 엉뚱하게 뽑힌다면 그들로서도 곤란하겠죠."
아무리 신성 유란드라 제국의 선제후로 있는 세 명의 대주교가 교황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이 지상에서 성 란셀롯의 정통성을 유일하게 잇고 있는 교황이 정점에 서 있는 교회의 인간일 뿐이다… 그들이 교황의 뜻을 따라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그런 엉뚱한 후보가 황제가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제국 안의 다른 귀족들도 원하지 않는 바였다. 물론 프란체스코 자신 뿐만 아니라,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저 체사레 보르지아 공도 그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시 선거로 황제를 뽑겠군요. 잘 될까요?"
"과연 그럴까요?"
"네?"
의외의 반문을 하는 체사레에게 놀랐는지 프란체스코가 묻자, 그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특수하게 마법으로 처리가 되어 있었는지, 그 종이는 공중으로 떠올라 체사레의 눈 앞에 펼쳐졌다.
"제가 보기엔 황제는 오히려 선제후들의 투표로 뽑히기보다는 실제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손으로 뽑히지 않을까 합니다."
"두 명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체사레는 눈 앞에 펼쳐진 종이에 적혀 있는 명단의 이름들 중에서 한 명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툭 하고 건드렸다.
"한 명은 팔라틴 백작 빈센트 공…."
그와 함께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던 글씨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글자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Vincent Eduard Wilhelm von Pfalz 빈센트 에두아르드 빌헬름 폰 발츠'라고 허공을 장식했다.
"그리고 레오폴트 공작…."
그리고 그가 다른 이름을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마찬가지로 'Leopold Loengrine von Hapsburg 레오폴트 로엔그린 폰 합스부르크'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을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팔츠 백작은 궁중백의 작위를 가지고 있어서 황실 내부의 일에 관여하고 영향을 줄 수 있음에는 확실하나 그 이상은 힘들죠. 그러나 반대로 레오폴트 공작은 강대한 군대를 지휘할 권한은 있지만 궁정 안의 일에 관여를 하기기 힘들구요."
"그렇다면 그 둘이 힘을 합친다면…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프란체스코는 체사레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탄성을 내었다.
"공의 말씀대로 충분히 조커 Joker 가 되고도 남을 조합이지만, 과연 팔츠 백작이 그 붉은 눈의 애송이 공작과 손을 잡을까요?"
"팔츠 백작은 궁중백의 자리에서 거의 2, 30년을 넘게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궁중에서 그만큼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누구와 손을 잡아야 유리한지를 잘 알 겁니다. 분명 그 사람은 레오폴트 경을 선택할 겁니다. 무엇보다 프란체스코 경이 말씀한 것 같이 레오폴트 공이 '애송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팔츠 백작이 안심하고 그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체사레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레오폴트 공 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팔츠 백작이 그래봤자 겨우 '늙은 여우'일 뿐이니까요. 아마 별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그를 선택하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편하기 때문에 오히려 동맹이 성립하기 쉽다는 거군요."
"적의 적은 바로 자신의 편이다… 마키아벨리 그 친구도 그렇게 말하곤 했죠."
그 말에 프란체스코는 체사레가 자기 휘하에 있던 마키아벨리를 레오폴트의 수하로 보냈던 사실을 기억했다. 설마 그를 그곳에 보낸 이유가 방금 전에 프란체스코와 체사레가 말했던 대화와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뭐, 유란드라 쪽이야 그렇게 될 거 같지만… 네우스트리아 쪽도 그렇게 평탄하진 않겠죠."
체사레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네우스트리아 쪽으로 돌렸다.
"일단 신성 유란드라 제국 쪽에서 레오폴트 - 팔츠 백작 연합 전선이 형성된다면 선제후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제대로 일이 터진다면 아마 내전이 발발할 겁니다."
"내전이라고요?"
"네, 내전이 벌어질 겁니다. 만일 네우스트리아 제국 쪽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있었다면… 아니, 몇 달 전같이 멍청하게 유란드라 쪽으로 먼저 쳐들어가 파비아에서 헛되이 대군을 소모하지만 않았다면, 그 내전을 이용해서 유란드라 제국을 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네우스트리아 내부에서도 더 이상의 대군을 지금 당장 만들어내긴 힘들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들이 함정을 도자기 굽듯 찍어낼 수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답하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레오폴트 공작이 안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프란체스코가 되물어 보는 말에 체사레도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가볍게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마치 일부러 침묵을 한 번 줘서 상대방의 주의를 집중시키겠다는 듯한 행동…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체사레는 차 맛을 음미하는 걸 끝냈는지 입을 열어 말했다.
"신성 유란드라 제국에게는, 네우스트리아 제국의 태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네우스트리아 제국은 그런 태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조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현 황제 앙리 4세는 그런 조정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만일 제가 레오폴트 공이라면…."

그리고 그 순간 체사레는 속으로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그를 시험하려는 듯 '기억 속의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 상황이라면 너는 어떻게 너의 나라에 닥칠 음모를 막아낼 거지, 조슈아?'

"…… 제가 레오폴트 공이라면 그것을 이용해서 네우스트리아 제국 안에도 내전을 일으킬 겁니다."


-2-



"일단, 저는 유란드라 제국 쪽의 내부 사정을 대략이나마 파악해야 할 거 같아요."
그렇게 운을 떼며 조슈아는 라르크 앙 시엘 성의 바깥 창공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결을 흩날리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까 바깥에서 즉석으로 둘러 앉아서 서류 없이 회의를 해 봅시다'
이렇게 조슈아가 엉뚱한 제의를 한 것 덕분에 조슈아와 알루에트 공주님, 도미니크와 바르토르를 위시한, 이 요새의 수뇌부 전원이 이 공중 요새의 성벽 위에서 둘러 앉아 한담을 나누는 듯 회의를 하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마 그 꼴을 다른 대장급 고관들이 봤으면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고 성토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요새의 장성급 인물들은 그런 조슈아의 기행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게 이 요새의 문제라면 문제였다.

"뭐, 레이몽드 그 양반이 절 씹어먹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지만. 그게 재상 각하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겠죠."
그 말 그대로였다. 파비아에서 네우스트리아 제국군 잔존 함대들이 생환한 후, 그 사후 처리에서 레이몽드 재상파들은 조슈아에게 뭐라고 시비를 걸 건덕지가 없었다.
생각같아서야 조슈아 백작에게 태자 전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 파면을 시키고 싶었지만, 그건 곧 샤를 드 부르봉 백작의 책임까지 묻는 - 실제로는 레이몽드 재상이 주도한 일이나 다름 없었다 -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몰래 샤를을 공모시켜 짜 두었던 음모가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조슈아 백작에게 포상을 하기를 요구하는 세력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 프랑수아 태자 전하와 조슈아 백작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아키텐 공작 랑베르 공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에 조슈아 백작을 벼락 출세한 신흥 귀족 애송이라고 폄하하고 있었던 노르망디 대공 샤를 대담공마저 조슈아 백작에게 황제의 이름을 대신하여 정부에서 그에게 봉토를 내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조정에서는 라르크 앙 시엘 주변의 영토인 프로방스 Provence 까지 조슈아의 봉토로 올리고, 조슈아는 샹파뉴와 프로방스 백작이자 라르크 앙 시엘 요새 함대 지휘관 겸 요새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새로운 봉토가 주어진 것에 기뻐할 조슈아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일엔 잘 신경을 쓰지 않는 조슈아에겐 아직도 적국에 억류되어 있는 태자 전하가 걱정될 뿐이었다.

방돔 백작 Comte de Beaufort 샤를 드 부르봉이 태자 전하를 '팔아먹은' 게 분명한 이상, 이젠 재상 측이 태자를 향해 거의 발악하듯이 마수를 들이댄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샤를의 집안인 방돔 백작 일가에 대한 처벌조차도 없는 걸 보면 분명하지 않은가.
다만 파비아 전투 전에 아키텐 공작과의 말다툼 도중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에르퀼이 휴양을 권유받고 군직에서 물러난 것이 조슈아에게 유일한 위로라면 위로랄까… 그 외에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귀환하는 길에 랑베르 공과 여러 대화를 나눠 보았습니다."
조슈아는 난간에 걸터 앉아 성벽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옆에서 보기엔, 특히 알루에트가 보기엔 위험천만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조슈아는 그렇게 겁이 나지는 않은 듯했다.
"일단 우리는 명분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태자 전하의 반환을 유란드라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아마 그 잘난 재상각하께서도 반대할 명분이 없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바르토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부관 구데리안 경이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그 반환을 요구하러 파견할 사신으로 제가 가기를 자원했습니다."
"네?"
그 말에 알루에트가 놀란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조슈아 님이 직접…?"
"전 태자 전하의 '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씩 조슈아는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말한 것이었다.
"사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제가 유란드라 제국 쪽의 첩보를 들은 것도 있거든요. 유란드라 제국 쪽도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그거 정말일까?"
그렇다면 상당히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한 듯 도미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어차피 다 알려지게 될 사안이겠죠. 국가적으로 국장도 치러야 할 테고… 문제는 그 다음이 아닐까 하네요. 황제가 서거를 했으니 그 다음의 제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 이제까지의 전통대로 유란드라 제국은 선제후들이 모여 금인 칙서 회의를 통해 황제 선거를 하거나 힘겨루기를 하게 될 겁니다. 뭐, 보통이야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조슈아는 그 붉은 눈의 천재 미남 장수를 떠올리며 말했다.
"합스부르크 공작 레오폴트 공이라면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세력을 늘여 그 결정을 일부러 늦추거나 방해를 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 기회야말로 세력을 확장하기 좋은 기회니까요. 선제후들에게 불만을 가진 중소 귀족들이 새로이 급부상하고 있는 레오폴트 공작에게 편승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고, 그건 레오폴트 공에게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흐음…."
한때 유란드라 제국의 귀족 집안이었던 바르토르가 긍정의 의미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유란드라 제국이 선제후들의 선거로 뽑힌 지가 어연 몇백 년이다. 그런 파워 게임에 끼이지 못하는데다 선제후들끼리의 암투에 휘말려 정파 간에 파워 게임을 해 살각한 여러 중소 귀족들이 이런 기회를 놓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황가는 황제의 지위까지 내어놓고 대공위 시대를 열지 않았던가.
"레오폴트 공작과 선제후들과의 사이가 과히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세력을 얻는 신진 세력을 견제하고 백안시하는 건 명문 가문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속성 중 하나니까요."
"우리 조슈아 각하께서도 사자왕의 아들이면서 백안시 당하는 걸 보면 말이지."
도미니크의 말에 조슈아는 약간 기분이 상한 듯 살짝 그를 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레오폴트 공작이 강수 强手 를 둔다면 유란드라 제국 쪽에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제국 전체가 반으로 갈린 정도의 여파는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신으로 가서 그 상황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올까 합니다만…."
"더 정확히 말하면 조슈아 네가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을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거 아니겠어?"
도미니크가 조슈아의 의중을 정확하게 집으며 말했다. 그 말에 조슈아는 부정을 하지 못하겠다는 듯 픽 웃어보였다.
"솔직히 그래요. 아시다시피 파비아에서도 정부에선 태자 전하를 적국에 넘겨 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번에 사신을 보낼 때 태자 전하를 무사히 둘지 솔직히 의문이 들어요. 그래서 전 랑베르 공의 인물과 함께 직접 태자 전하를 모시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알루에트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조슈아가 프랑수아 태자 전하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잘 아는 그녀는 그런 조슈아의 의사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조슈아는 이제 아슬아슬하게 성벽에 걸터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서선 알루에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유란드라로 가면 분명 '그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갈 거에요. 각오해 두세요, 알루에트 씨."
"네?"
알루에트에게 뭔가를 각오하라는 조슈아의 말에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이해시키려는 듯 조슈아는 상냥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생 캉탱과 파비아 전투에서 제일 피해가 없었던 함대가 바로 우리 라르크 앙 시엘의 함대였어요. 분명 우리를 견제하고 있을 겁니다."
"아…."
그건 사실이었다. 조슈아의 지휘 덕에 그 두 번의 큰 전투에서도 경미한 피해만 받았던 상파뉴 백작령 함대, 즉 라르크 앙 시엘 함대는 만일 재상 측에서 군사 행동을 할 경우에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전력이었다. 이런 군사력이라면 그들로서는 회유를 하거나 전력을 꺾어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조슈아가 그들에게 회유당할 일이 없지 않은가.
"만일 제가 유란드라 제국으로 파견되면 그때 분명히 반응을 보일 겁니다. 태자 전하와 제가 둘 다 이 나라에 없다면 구심점도 없는 셈이니 자신들에게 반대되는 세력의 결집도 힘들 거라고 생각하겠죠."
"준비를 해둬야 겠군요."
바르토르의 말에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움직임이 생긴다면, 분명 정부 측이 이곳에 어이 없는 명령을 내릴 겁니다. 이 요새의 중추 인원을 황도로 소환한다던가…."
"혹시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데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는 듯 주저하면서도 도미니크 옆에 있던 한 귀족 청년이 조슈아에게 말했다. 금발이 섞인 회색 계열의 머리결을 가진 앳된 나이의 그 청년은 조슈아에게 염려된다는 투로 말했다.
"태자 전하와 '사부님'께서 유란드라 제국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우리 함대로 하여금 유란드라 영토에 쳐들어 가라는 명령을 내릴지도 모릅니다만… 설마 일부러 그렇게 하기야 할까요?"
그 청년의 입에서 나온 '사부님'이란 호칭에 조슈아는 못마땅했던지 이마에 실핏줄까지 돋았다.
"글쎄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만… 일단 너는 그 '사부님'이란 호칭부터 빼주지 않으련, 세자르 César ?"
"사부님이니까 사부님이라고 하죠. 그럼 조슈아 이 자식아 뭐 이렇게 불러드릴까요?"
조슈아의 알비온 사관학교 후배인 세자르 시엘 스트라뒤 드 오베르뉴 César Ciel Stratus de Auvergne 자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세자르 자작 경우도 상당히 특이한 괴짜 수재인 젊은이었다. 나이도 거의 조슈아의 아들인 세드릭의 형 또래로 보일 정도로 어린 나이의 '애송이' 군인이었다. 조슈아도 현재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넘어가는 나이라서 세자르와 조슈아는 군 밖에서 보면 형님과 동생이라고 서로를 불러도 좋을 나이 차였다.
사실 세자르 자작이 네우스트리아의 대검 귀족 Noblesse D'epee 가문 중 명문에 속한 오베르뉴 가문의 계승자라서 - 향후 10년 안에 오베르뉴 공작 전하가 되실 몸이었다 - 그 덕을 본 것도 있었겠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빠르게 군에서의 승진이 빨랐던 것은 겉으로 보는 그의 모습이나 언동에서 생각할 수 없는 재능 덕이었다. 공격적인 성향에 기초를 두면서 절대 무모하진 않은, 지혜로운 전략을 추구하는 그의 재능은 굳이 그 명문가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네우스트리아 군의 중진에 무난하게 입성하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세자르 그 자신은 오히려 자원해서 이곳 라르크 앙 시엘 요새에 있는 조슈아 백작의 휘하로 들어갔다. 왜 하필 이런 변방으로 스스로 왔냐고 조슈아가 묻자 세자르 자작이 대답한 말도 꽤 걸작이었다.
"사실 '사부님'덕에 귀찮은 일에 안 말려들어가니까 좋잖아요? 제가 아무리 뛰어나게 뭘 해봐도 사부님이 뭘 해버리면 바로 묻혀버리니까 주목받을 일이 없어서 편하죠 뭐. 그래서 자원한 거에요."
사실 그가 어린 시절 알비온에서 수학하던 시절, 사관학교에서 조슈아의 후배로 들어가 조슈아와 친분을 쌓았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조슈아에게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자르는 조슈아와 여러 차례 전략과 전술 이론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면서 그의 재능에 감탄해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사부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거 때문에 한동안 조슈아가 세자르에게 '차라리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라고 타박을 주곤 했지만 요새 들어서는 그것마저 포기한 듯했다.

"사부님, 일단 그 호칭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하시기로 하시죠. 우선…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왜, 설마 유란드라 제국 쪽으로 쳐들어가라고 내가 말할 거 같니?"
그 녀석 참 말 더럽게 안 듣네… 그렇게 생각하며 조슈아는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도미니크 형님께서 '그곳'에 연락을 취해 주세요. 분명 호응을 해 줄 뿐더러, 우리 함대를 정부의 비난에서 보호해 줄 만한 곳입니다. 아마 재상 측에서도 손이 못 미치는 곳일 거에요."
"어디를 말하는 거지?"
도미노의 물음에 조슈아가 답했다.
"피레네 아틀란티크 Pyrénées-Atlantiques (피레네 산맥 대서양 연안부) 의 나바르 왕국 Royaume de Navarre (Reino de Navarra, Nafarroako Erresuma) 이요."
"… 아!"
그제서야 도미니크는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알루에트도 그 낯설지 않은 지명에 조슈아가 의도한 바를 알았다.
"거기는 앙굴렘의 마르그리트 Margarite 전하의…."
"네, 알루에트 씨."
고개를 끄덕이며 조슈아가 말했다.

"「여왕 마고 La Reine Margot」, 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 전하의 나라죠. 프랑수아 태자 전하의 '누님'이신 분의 땅인…"


-*-



"오랫만입니다. 형님."
후안 Huan 의 인사에 체사레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천년 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봉헌한 이래 역대 교황이 기거했던 라테라노 Laterano 궁전의 발코니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체사레에게 그의 동생 간디아 Gandia 공작 후안 보르지아 Huan Borgia 는 친근하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흑빛이 도는 머리결의 체사레와는 달리 보르지아 가문 특유의 붉은 사자갈기 같은 머리결을 가진 그는 오랫만에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형'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오랫만에 오셨는데 아버님도 뵈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동생도 보고 말이죠."
"잠시 들렀을 뿐이야."
무심하게 대답을 하는 체사레의 반응에 픽 웃으며 간디아 공작은 체사레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 손을 턱 하고 얹으며 말했다.
"요새 바쁘신 것 같습니다. 발렌시아 대주교의 일 말고도 따로 하고 계신 일도 있으신 것 같은데."
"네 녀석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동생'?"
체사레가 동생이라고 말하는 그 어조엔 뭔가 모를 이질감이 있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경멸과 적의가 미세하게나마 섞여 있다고나 할까.
"아버님과 '계약'하신 대로군요. 그 '사자왕 리가르도 Ricardo' 님의 '사업'을 위해 형님께서 뭔가를 꾸미고 계신다는 건 저도 알고 있지요."
"그래? 부디 네가 방해가 되지만 말아다오."
그 말에 섞인 적의가 더욱 더 짙어졌다. 체사레는 그럼에도 읽고 있는 책을 덮지 않고 그대로 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루크레치아 Lucrezia 는 만나지 않으실 겁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애가 형님을 많이 기다렸어요. 그래서 그 동안 그 애의 외로움을 제가 밤마다 달래 줬잖습니까?"
"……."
그 말에 체사레가 책을 읽고 있던 손이 멈추었다.
"어제도 밤새도록 형님을 그리워 하면서 애타는 것 같길래 제가 새벽까지 침대에서 위로해 줬죠. 상당히 쌓여있던 거 같던데요,하하. 제 허리에 다리를 워낙 세게 감아서 피곤해 죽는 줄 알았…"
그러나 후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쾅!
어느새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체사레는 후안의 멱살을 잡아선 벽에 메쳐 버리고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졸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벽면을 썼다고는 하지만 순식간에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그 정도까지 들어올린 체사레의 악력과 손 힘은 놀랄 정도였다. 그 서슬에 순식간에 기도를 제압당한 후안이 고통스러워 하며 놀란 눈으로 체사레를 쳐다보았다.
"형님.. 왜 이런...크윽!!"
"잘 들어라, 빌어먹을 마라노 새끼. 네가 그 빌어먹을 교황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올라타는 것 따윈 난 신경 쓰지 않아. 네놈이 귀족 딸년들을 후리든 음탕한 수녀 암캐들과 간음하든 난 아무 상관 안해."
체사레는 진짜로 후안을 죽이려고 하는 듯이 이글대며 노려보는 눈길로 말했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 네 친여동생을 근친상간으로 범한다는 소리를 그따위로 싱글싱글대면서 지껄이지 마라. 네 놈은 내 '친동생'도 아니고, 설사 친동생이라도 그 따위 개소리를 들어줄 만큼 내가 그렇게 만만한 호인이 아냐. 차라리 우리 '어머니'인 줄리아 파르네세 그 코르티자나 Courtigiane (娼婦) 년이랑 붙어먹었다고 지껄이지 그래? 우리 '아버님'인 로드리고 그 양반의 육노예 그 년 말야."

체사레가 말하고 있는 줄리아 파르네세 Giulia farnese 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즉 체사레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두 번째 '첩'이었다.
크로노디스 교의 교리에 따르면 교황을 위시해서 모든 성직자에겐 처자식을 거느릴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로드리고 보르지아 - 알렉산데르 6세의 속세의 이름이다 - 에겐 그런 교리는 길가에 널부러진 개똥보다 못한 존재였다. 게다가 로드리고에겐 기벽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유부녀와 간음을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었다.
크로노디스 교의 본산인 유란드를 다스리는 '호수의 주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계명 중 하나인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라는 계율을 어기는 것에서 쾌락을 찾는 괴벽이 있었다. 심지어 후안과 루크레치아도 알렉산데르의 애인이었던 모 유부녀의 '딸'이었던 카타네이 데 반노차를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 한 침대에서 간통을 해서 낳은 자식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뒤를 이어 줄리아 파르네세를 교황이 새로운 첩으로 받아들인 일은 이런 일에 무감각했던 유란드 시민들에게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시 유란드 시민들이 절세 가인이라고 칭했던 줄리아를 알렉산데르는 일부러 유란드 시의 유력 가문인 오르시니 가문의 젊은이와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 둘을 결혼을 시킨 그 날, 오르시니 가문의 신랑은 유란드 시 밖으로 추방되고 결혼식이 바로 끝난 채 줄리아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그 차림으로 알렉산데르의 처소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데르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직접 주례를 서 주었던, 갓 신부가 된 줄리아를 웨딩 드레스를 그대로 입힌 채 침대로 데려가 그 날 밤 관계해 자신의 첩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줄리아 파르네세는 오르시니 가문의 부인이 아니라, 「아서 왕의 신부 Sposa di Arthura」라는 이름으로 유란드에 선포되었다. 쉽게 말해 교황의 새로운 '첩'이 되었다고 공표가 된 것이었다.

"그 빌어먹을 창녀 같은 년이랑 붙어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체사레는 그렇게 말하며 후안의 멱살을 놔 주었다.
"컥… 쿨럭! 쿨럭!"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후안은 주저앉으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 후안을 내려다보며 체사레는 말했다.
"내 앞에서 한번만 더 싱글거리면서 그 따위 말을 지껄이면 네 놈의 시체를 티베레 강 위에서 고기밥으로 던져줄테니 알아서 자중해 주길 바란다. 알겠나, '동생'?"
동생이라고 말하며 툭툭 어깨를 두드려 준 체사레는 다시 의자로 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
후안은 순간 살기가 돋힌 눈으로 체사레가 앉아 있는 등 뒤를 노려보았다. 허리에 차고 있는 자신의 레이피어 Rapier 에 그는 순간 손이 갔지만,
"… 지금이라도 원하면 티베레 강바닥 구경을 시켜줄 수 있어."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체사레가 왼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나가는 방문… 저 문으로 꺼지라는 의미이리라.
"……."
후안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빌어먹을 '형'이란 작자의 목을 따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길같이 치솟았지만, 때가 아님을 절감하고는 의외로 순순하게 체사레가 가리키는 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그의 표정이나 눈빛엔 체사레에 대한 살기가 가득했지만.
- 쾅!!
마치 문이 부셔져 나갈 듯이 후안은 세차게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문소리를 듣고 체사레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발코니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라테란 궁전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 언제까지 내가 이 곳에서 이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할까…."
뭔가 생각에 깊이 잠긴 듯 턱을 괴고 체사레는 무언가를 응시하듯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런 그의 귀로 뒤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오는 느낌도 체사레의 등 뒤에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체사레는 들어온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이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 너라는 걸 몰랐다면 넌 지금 내 손에 두 번 죽어 있을 거야, 루크레치아."
체사레는 어느새 들고 있었는지 오른손에 쥔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마치 금실로 만들어진 것같이 화사한 색의 금발 머리결을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늘어뜨린 미모의 아가씨는 마치 소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체사레에게 다가왔다.
그 눈동자 안에 아련한 그리움을 품은 채 그녀는 이제 체사레가 일어서 자신의 앞에 서는 걸 바라보며 마치 기도를 드리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손에 죽는 거라면 그 죽음도 고통스럽지 않을 거에요."
"인형같이 사는 삶보다는 내 손에 죽고 싶다는 소리 같구나…."
곧 있으면 페라라 공작 가문에 3번째 결혼을 하러 가야 할 이 가련한 '동생'을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체사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문을 위해서 네가 희생해야 한다… 따위의 '아버지'가 지껄이는 말같은 건 난 하고 싶지 않아, 루크레치아. 네가 바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단다."
"네, 오라버니. 저는 이 보르지아 가문의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아요. 다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들고 있는 체사레의 오른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체사레의 단검이 그녀의 드레스 위로 다가가는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듯 체사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저는 '요아킴 오라버니'의 노예로 사는 쪽을 택하고 싶어요."
그녀가 체사레의 '원래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에 약간 놀라는 것도 잠시, 그녀는 그 단검으로 자신의 드레스를 가슴께에서 밑으로 그어버렸다.
"……."
눈 깜짝할 새에 체사레의 앞에서 그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눈부신 하얀 나신 裸身 을 드러낸 루크레치아… 그 뽀얀 젖가슴께에 이젠 체사레의 오른손을 가져다 그녀의 눈부신 살결을 느끼게 하며 그녀는 마치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한 하와같이 유혹적인 눈빛으로 체사레를 올려다 보았다.
크로노디스 교에서는 여자를 에바 레디비바 Eva Rediviva (사악한 이브) 라고 했던가… 하지만 체사레는 상관 없었다.
그는 말없이 나신의 루크레치아를 품에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오라버니…."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침대보에 뉘여 흐트러져 있는 루크레치아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걸 바라보며 체사레도 자신의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인이 사악한 에바라면 남자는 그보다 더한 악마들이 아닌가… 이런 여인을 타락했다고 나무랄 권리가 그 누가 있을까. 그 자신도 동조자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체사레는 거친 숨결과 함께 루크레치아와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었다.
교황이 쓰는 화려한 문양에 비로드가 드리워진 아름다운 침대 위에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뒤엉켜 욕정의 몸부림을 시작하는 두 남녀… 루크레치아의 입술을 느끼며 체사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배덕 背德 이 벌어지는 유란드가 성도 聖都 라면… 그 신이라는 작자는 창녀촌 포주나 다를 바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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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아킴 | 2009/10/25 19:58 | 바람과 대지의 노래 | 트랙백 | 덧글(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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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eokbusin at 2009/10/26 02:27
1. 으아아, 설마 했던 일을 기어코 쓰셨군요. 하지만 본문에 나와있는 것보다 더한 설마까지 쓰시진 않으시리라고 믿사옵니다.

2. 실제 역사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배다른 형인 장남 페드로 루이스가 천수를 누렸다면 차남인 체사레는 매서운 능력을 자랑하는 추기경으로 어쩌면 교황의 자리까지 올라가, 파울루스 3세가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반도에 보르자 공국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장남 페드로 루이스는 성직자의 사생아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군인으로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결국에는 교황권과 결탁하려는 아라곤 국왕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간디아 공작과 아라곤 왕족과의 약혼까지 차지했던 인물인데, 그 시대에는 흔한 전염병으로 20대에 사망하는 바람에 차남이 성직자가 되는 집안의 전통대로 추기경예하이던 체사레를 건너뛰어서 3남인 후안이 간디아공작이 된 것이 알락산데르 교황의 "시궁창"시대를 열게 되버렸지요.--;

바로 그 "시궁창"의 일원인 보르자의 후손이 예수회의 창립멤버가 되고 성인으로 추증까지 되는 걸 보면 추악함과 방종함의 반동이랄까 시궁창에서 백합꽃이 피었달까, 세상살이의 묘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그런데, 양부인 리처드 아스피어는 대체 어디에 있답니까? 설마하니 양자에게 칼부림 당해서 무덤에 있는 건 본문을 보자면 아닐테고, 세파를 겪게 하는 것도 용의 아이들을 키우는 일환이라지만 형은 "시궁창"집안에다 밀어넣고 동생은 하기도 싫은 군인노릇을 시키고 있으니 무슨 생각인지 궁금할 지경이군요.^^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10/26 19:22
1. 이보다 더한 것도 쓸 생각입니다(.....)

2. 오호오호. 대충 체사레(요아킴 아스피어)와 후안, 루크레치아,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의 갈등과 애증관계를 묘사하는 게 일단 목표입니다. 일단 역사상으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전 글의 에로도(...)를 위해서 그 익히 알고 있는 '막장가족'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_-;
체사레 경우야 뭐 보르지아 가문과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으니 문제는 안되지만 말이죠. 아 참고로 이 소설에서도 루크레치아가 실제적으로 체사레와 후안과 알렉산데르의 정부(....)입니다. 체사레야 뭐 남남이니까 문제될 건 없지만 문제는 나머지 두 사람이죠(..)

3. 그분은 거의 흑막(....)급에 해당하는 분이라서 좀 한참 후에 등장하실 겁니다. 일단 체사레(요아킴)가 보르지아 가문에 입적하게 된 계기가 리처드의 영향이 있었다는 건 알려드리죠. 조슈아 경우는 걍 지가 어쩌다가 군인이 되버린 거에요(...) 리처드랑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
Commented by jet at 2009/10/26 17:21
조슈아와 레오폴트가 처음으로 직접 만나게 되겠군요. 기대되는데요?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10/26 19:23
글쎄요. 현재 플롯을 짜놓은 것에서는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하는 걸로 적어놨는데... 일단 더 궁리를 해보죠.
Commented by ダ-スケロロ at 2009/10/26 22:20
웃흥~
Commented by 요아킴 at 2009/10/29 18:41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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